창원 근대를 가다 (1) 프롤로그
창원 마산 진해가 합쳐 통합 ‘창원시’로 출범했다. 역사 속에서 창원은 마산 진해와 따로 존재하기도 했고 하나로 합쳐 존재하기도 했다. 통합과 분할이 되풀이돼 온 ‘통합’ 창원은 한국 근·현대사 격랑의 중심에 있었다. 수도권이 아님에도 일제의 군항 건설에 따라 근대사의 중심에 섰던 진해, 3·15 의거로 현대 정치사의 중심이자 마산수출자유구역으로 산업화의 중심이 됐던 마산, 동남권국가산업단지로 ‘중공업 입국’의 견인차 역할을 한 창원을 빼고 한국의 근·현대사를 얘기할 수는 없다.
‘따로 또 같이’ 걸어온 통합 창원시의 근·현대사를 되짚어 보는 것은 통합시민의 역사적 정서적 동질성을 드러내고 더 행복한, 더 밝은 미래를 만들어갈 동력을 찾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905년 부산포 감리서 직원들. 오른쪽 2번째가 창원 감리 김서규, 왼쪽 첫번째가 경남은행 전신인 구포은행을 창설한 윤상은. 가운데 앉은 이는 양씨 성을 가진 총순(현재의 경찰서장).
‘창원(昌原)’이란 지명은 1408년(조선 태종 8년) 8월 의창(義昌)과 회원(會原) 두 현을 합쳐 ‘창원부’를 설치했다는 데서 등장한다.
전래로부터 창원은 일본과 가까울 뿐만 아니라 천혜의 포구가 많고 주변 일대 농경지가 많아 임진왜란 등 왜구의 침입이 끊임없었던 곳이다. 1601년 임란 중 관민들이 단결해 성을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던 의지를 높이 사 ‘창원도호부’를 ‘창원대도호부’로 승격시켰을 정도로 조선시대 지방 행정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1876년 조선 개항으로 한반도는 일본의 대륙 침략 거점지가 됐고, 1910년 강제 병합 후 지리적으로 그들에게 매우 중요했던 ‘창원마산포’를 일대 중 마산포는 식민지 근대도시 ‘마산’으로, 웅천(熊川)’의 한 해변은 식민지 군항도시 ‘진해(鎭海)’가 됐다.
이번 기획에서는 일제 강점기까지의 근대사를 일본제국 해군 기지로 조성됐던 진해 중심으로 마산과 창원을 곁들여 짚어나간다.
1876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대원군의 쇄국정치가 막을 내리면서 ‘부산포’를 개항했다. 1867년 메이지 유신으로 시작된 ‘근대국가 일본’ 만들기는 서구 나라들이 그러했듯 ‘부국강병’으로 식민지를 확대하는 것이었다. 1895년 대만을 식민지로 만든 후 조선을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경남은행 전신인 구포은행을 창설한 윤상은이 사용했던 회중시계.
1899년 마산포가 개항하자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견제하고자 군사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치밀하게 마산 해안가 토지를 매입하는 등 그들의 군사도시 만드는 계획을 진행했다.
1900년 1월 부산 일본영사관 마산분관을 마산일본영사관으로 승격시켰는데 이 시기에 일본인 거류민은 불과 30여명이었다.
진해는 일본이 군사 목적으로 1912년부터 만든 군항도시이다. 도시 중앙에 자연녹지공간 제황산을 두고 남북으로 북원·남원 로터리를, 도시 중앙에 중원로터리를 설치해 방사형으로 연결한 한국 최초의 계획도시다.
1914년 진해면, 1931년 진해읍, 조국 광복과 함께 한국 해군의 요람으로 자리했으며 1955년 9월 ‘진해시’가 됐다.
해군도시 진해에는 근대 일본 침략기의 각종 유물은 물론, 한국 해군사의 생생한 증거자료가 곳곳에 흩어져 있다. 많은 유적이 해군 군항에 속해 있어 민간인이 쉽사리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군항 바깥에도 눈길을 끄는 유적이나 자료가 산재해 있다. 일제가 군항에 식수와 생활용수를 공급하고자 1908년부터 1914년까지 조성한 웅동수원지, 일제 해군 진해요항부 해군병원장 관사 등이다.

구 진해 요항부 청사로 사용된 이 건물은 1912년 착공해 1914년 3월에 준공했다. 이 시기에 가덕도 외양포에에서 마산으로 이전했던 ‘요새사령부’가 진해로 이전했다. 1916년 일제는 ‘진해요항부’로 개청했다. 지상3층 조적식 구조의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현재 해군기지사령부 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고 일본 침략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찍이 일제와 접했던 진해 주민들은 선진문물에도 일찍 눈을 떠 교육운동이 활발히 벌어지기도 했으며 그로 인해 항일운동도 활발했다.
일제시대 웅동 수원지 조성공사 때 유입된 화투.최근 진해시가 세계군악제를 개최하면서 일본 자위대 군악대를 초청하려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포기한 적이 있듯이 진해는 대일본 관계에서 아킬레스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까운 일본과의 관계마저 풀어가지 못한다면 세계 속에서의 대한민국이 자칫 초라해질 수도 있다. 실제로 진해에 남아있는 한일 화합의 길도 찾아 떠나본다.
그에 바탕 해서 광활한 해양으로의 진출이라는, 해양시대 개척의 전초기지로서 창원의 길을 찾아 나선다.
도움말·자료/김현철 김씨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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