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근대를 가다 (3) 침략의 길 ② 웅동 저수지
1882년 ‘자국 영사관 보호’라는 명분으로 일본군이 서울에 상주하게 됐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으로 청국군이 국내에 들어오자 이것을 빌미로 대규모 일본군이 유입되면서 이땅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이를 기회로 서울에 2개 중대(1개 중대는 200여 명), 부산과 원산에 각각 1개 중대를 주둔시켰다.
봉납비. 웅동 수원지 조성공사 당시 무엇을 바친 것을 기념한 비석으로 해방되고 파손된 것을 복구했다. /김구연 기자1900년대 들어서면서 러시아의 남진이 시작되면서 조선을 그들의 보호 아래 두려했던 일본과 러시아 갈등은 조계지 설정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했고, 그 중 노골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한 곳이 ‘창원마산포 조계지 분쟁이었다.
이는 곧 진해만 군항 건설과 연관돼 있다.
1904년 1월 12일 거제도 송진포에 대일본 가근거지 방비대(大日本 假 根據地 防備隊)를 설치했다. 그해 2월 8일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2월 23일 강압적으로 ‘한일 의정서’를 체결, 한국을 보한다는 명분으로 서울, 평양, 의주, 함경도, 진해만 등 5곳에 그들의 병영 등 군사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8월부터는 러일 전쟁의 진척에 따라 한국에 무력 시외와 아울러 함대 엄호를 목적으로 가덕 수도의 서쪽에 되는 거제도의 저도와 동쪽이 되는 가덕도이 외양포에 포대를 설치해 포병대를 주둔시킬 시설공사를 시작했다.
1905년 1월에는 외양포 비포공사가 완료됐고 5월 7일 진해만 요새사령부가 출범했다.
1906년 을사늑약의 주역이었던 참정대신 박제순은 사실상 일본 군항건설을 허가함으로써 그해 9월 14일 마산 이사청 일본 이사관 이마쓰와 창원 감리 김서규의 입회 아래 진해 군항 예정지를 획정하고 입계표를 세웠다.
1904년 2월 8일 여순항을 공격하고 다음날 인천 부근에서 일본 연합함대가 러시아 군함 2척을 격파하고는 2월 10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후 흑해 연안에 있던 러시아 ‘발틱함대’가 장거리 이동을 해 1905년 5월 27일 대한해협에서 대규모 해전이 벌어졌다. 일본 토오고호 하지로오(東鄕平八郞) 사령관이 이끄는 40여척의 일본 연합함대와 총 48척을 거느린 로제스트 벤스키 중장이 이끄는 발틱함대와의 격돌은 발틱함대가 대패함으로써 끝났으며, 이로써 사실상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결정됐다. 당시 러시아 함선 침몰 19척, 빼앗긴 함선 15척, 병원선 억류 2척, 전사자 5000여 명, 사령관을 비롯한 포로 6160명이었으며 48척 가운데 블라디보스톡까지 귀항한 것은 순양함 1척, 구축함 2척뿐이었다. 반면 일본측의 손실은 수뢰정 3척과 700명 가까운 사상자 뿐이어서 피해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1908~1914년 웅동 수원지 공사 때 사용한 협궤열차. 일명 시그렁차. /김구연 기자 지금도 웅천 입구에 남아있는 협궤열차의 터널. 흰돌매에서 웅동수원지까지 놓여있었던 철길(깜장길)이 통하던 길이며 수원지의 펌프 연로인 석탄을 협궤열차로 실어날랐다. /김구연 기자.1908년 3월 일본 사세보 해군 진수부 결리부 건축과 파출소를 웅동 관남리에 설치하고 진해군항에 사용될 용수를 공급할 수원지 공사를 시작했다. 이게 ‘웅동 수원지’인데 1908년 3월 일본 히로시마 다나쿠찌 토목조 출장소에서 공사를 시작했다. 1912년 3월에 토목공사가 완료되면서 담수를 시작했고, 이후 펌프실 등 부속시설이 갖추어지면서 1914년 웅동수원지가 준공됐다.
1910년 4월 임시해군건축지부를 두고 사세보 해군 진수부 건축과 파출소를 흡수하여 군항설치공사에 들어갔다.
일제 시대 조성된 웅동 수원지. 현재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묶여 민간인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 /김구연 기자봉납비. 웅동 수원지 조성공사 당시 무엇을 바친 것을 기념한 비석으로 해방되고 파손된 것을 복구했다. /김구연 기자
이듬해 웅중면 웅서면 일대를 제5해군구의 군항으로 하고 동양 제1의 군항경역을 획정하여 1914년 이른바 진해진수부를 개청할 예정으로 건설을 추진했다.
1911년 외양포에 ‘진해만 요새사령부를 마산으로 이전해 ‘마산요새사령부’라 칭하고 1912년 송진포의 일본 해군 방비대를 진해로 이전했다. 1914년 ‘마산요새사령부’를 진해로 이전 ‘진해요새사령부라 칭했다. 이로써 일제에 의한 진해 군항 설치는 일단락 됐다.
웅동수원지 조성공사 당시 일대에 유행하던 민요가락을 살펴보면 “한양 말년(조선 말)에 등(산등성이)에서 난 사람은 산다 / 웅천 띠골(두동), 안 마천(마천 안쪽 사는 수원지 일대) 못난 내 한이야” 즉 두동 사람은 그자리에서 살지만 마천 안쪽 사람은 쫓겨나온다는 의미로 조상대대로 살아온 삶터를 송두리째 수장시키게 된 주민들의 한이 서려 있다.
1908~1914년 웅동 수원지 공사때 사용된 흙다지는 도구 ‘달구’ /김구연 기자저수지가 완성되고 둑 아래 그들이 좋아하는 벚꽃을 심었는데 1960년대 후반까지 ‘웅동 벚꽃장’이 섰다.
음력 7월 7일 칠성날 마을 주민들은 수문에서 폭포수를 맞으면 일년 내내 땀띠가 나지 않는다고 하여 70년대까지도 이 행사가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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