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근대를 가다 (4) 침략의 길 ③ 진해군항

1509년 중종실록에 웅천현 생활모습을 기록했다.

“웅천현 보평역은 일본인 거주지와 거리가 겨우 1리 남짓한데 ㅇ리본인 남녀가 부채를 징수해 낸다는 핑계로 우리 민가에 들어가 밤낮 없이 왕래하여 서로 친하고 사랑함이 형제와 같고 …… 짧게는 1~2년 길게는 3~4년동안 체류하면서 항상 일본인들과 더불어 술과 음식으로 교분을 쌓고 금물(禁物)을 파는 등…….”

이처럼 진해는 일찍부터 일본과 교류가 활발했던 곳이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일제에 의해 군항으로 개발되면서 일본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곳으로 자리잡았다.

1914년 진해면, 1931년 진해읍, 그리고 조국광복과 함께 한국해군의 요람으로 1955년 9월 진해시가 됐다. 당시 인구 7만이었다.

1920년 대 제황산에서 내려다본 진해시 전경

진해(鎭海)는 일본이 군사목적으로 1912년부터 만든 군항도시이다. 도시 중앙에 자연녹지공간 제황산을 공원으로 하고 남북으로 북원·남원 로터리를, 도시 중앙에 중원로터리를 설치, 이곳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도로를 만들어 어느 곳을 가든 가깝고 쉽게 찾아갈 수 있는 한국 최초의 계획도시를 만들었다. 비록 일본이 만들었지만 근대도시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곳이며, 아직까지도 진해 서부권은 이때의 도시 근간을 유지하고 있으며 곳곳에 유적이 개발의 손길을 타지 않고 남아있다.

특히 진해에는 6개 건물이 등록문화재인데 대부분 일제 침탈로 이뤄진 것인데다 군사시설이 대부분이다.

진해우체국 청사.

◇진해우체국 = ‘진해’라는 도시가 탄생하기 전인 1910년 한일 병합과 함께 일본의 우편소가 설치됐다.  1912년 5월에 1531평 터에 199평의 청사 건축에 착공해 10월 25일 준공됐다.고대 서구의 여러 건축양식을 절충한 건물로 지붕에는 반원형 채광창을 두었다. 이 우체국은 국가지정 사적 제 291호다.

진해우체국이 들어서기 전 중평한들에 서 있던 포구나무(팽나무).

우체국이 서기 이전 이 일대는 기름진 들판 ‘중편한들’이었는데 한복판에 옛부터 수령 1200여년 된 거대한 팽나무가 있었는데 이를 중심으로 한 방사직교형 도시계획하에 1912년 도시건설이 시작됐다.

진해 명물 뽀죽집. 남북 2채가 세워져 요정으로 성업했지만 지금은 1채만 남았다.

◇뾰족집 = 192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3층 팔각 누각집은 지금도 ‘뽀족집’으로 불리며 남아있다. 원래는 중원로터리를 중심으로 대칭되게 남북으로 각각 1채씩 건축됐다고 하지만 지금은 1채만 남았다.

◇일본인 상가 장옥(長屋) = 진해에 본격적으로 시가지가 형성되기 시작한 시점은 1931년 진해면에서 진해읍으로 승격할 시기였다.

아직도 남아있는 2층 장옥들은 1층은 상점, 2층은 주거를 목적으로 한 건물로 당시 도로변의 건축은 2층 이상 되어야 허가를 내 주었다.

일제 강점동안 진해 읍내에는 한국인이 살 수 없어 경화동 등 외곽에서 살아야했다. 또한 군사시설 보호라는 명목으로 사진 촬영을 하려면 요새사령부의 허가를 받은 후 찍은 사진은 검열을 받아야 했다.

1920년 대 사용된 제도 용구. 1900~1910년 대 사용된 측량도구. 우리나라 최초의 수입담배 HERO

자료·도움말: 김현철(김씨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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