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창원을 가다 (6) 항일의 길 – 민족교육
1922년 웅천장날 진해 수도에 사는 청년이 중절모를 쓰고 나타나자 성내에서 모자점을 하는 가토가 누명을 씌워 웅천주재소에 고발했다. 일본인 순사가 “조시니노미가 도도지리니”(조선놈이 도둑질이나 하고) 하면서 모자를 빼앗고 청년의 뺨을 때렸다. 이후 웅천 청년단원이 나서 청년의 무고가 증명되었으나 한국인들에게 모독한 분풀이로 상점에 돌질을 하고 순사를 붙들고 주먹다짐을 했다. 이 사건은 1919년 3.1운동 이후 대일 감정이 표면화된 사건으로 당시 웅천 일대 일본인들을 긴장시켰다.
이처럼 항일운동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생활 속에서 일본인이나 일제에 의한 수탈과 강압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민족의식을 함양하고자 애썼던 근대 교육의 영향도 컸다.
19세기 후반 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유생층이 쇄국정책을 강행했지만 강화도조약(1876년)이 체결돼 일본에 개국하자 미국을 비롯한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열강과도 통상조약이 체결돼 문호를 개방하게 됐고, 서구 근대문화가 급속이 유입됐다.
물밀듯 들어오는 서구문명앞에서 선각자들은 신교육을 통해 국가를 중흥하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을 경향 각지에서 벌였다.
진해에서 일어난 여러 독립·항일운동의 중심에는 계광학교(啓光學校)와 개통학교(開通學校)가 있었다.
진해 개통학교 제2회 졸업사진.
옛 웅천현 객사(1968년 철거)가 있었던 자리에 웅천초등학교가 있다. 이 학교는 1906년 주기효가 설립한 ‘개통학교’를 모체로 하고 있다.김구석을 비롯한 주기효, 양주용 등은 웅천에 개통학교를 설립하고 보통과와 2년데 고등과를 설립해 교육을 시작했다. 그 후 웅천현 동헌을 교사로 사용해야 할정도로 경제적 상황이 나빠진데다 일제의 탄압에 시달려 1915년 폐교됐다. 2년 후 ‘웅천공립보통학교’가 신설되면서 지역의 교육을 이어가게 됐다.
웅동지역에서도 신교육 바람은 마찬가지였다. 지역의 유지들이 소성재(小成齋·인천이씨 재실) 또는 마천교회당을 이용해 학습을 한 지는 오래였다. 이후 문세균 배익하 등이 아일랜드인 선교사 심익순과 더불어 1912년 마천동에 계광학교를 설립했다.
일본강점기에는 교원들도 이같은 지휘도를 차고 학생을 가르쳤다. 교원이 차던 지휘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 지방의 만세운동에 주동 구실을 하다보니 일경의 탄압으로 학교는 4~5개월동안 문을 닫아야 했다.
1922년에는 고등과를 개설하면서 이 일대의 신학문 요람으로 자리잡게 됐다. 경화 대정학교, 웅천 개통학교 졸업생은 물론, 김해지역에서도 계광학교 고등과에 진학했던 것이다. 1930년 폐교될 때까지 애국가를 가르치고 강건한 체력과 높은 기상을 배양해 독립의지를 고취시키는 데 힘썼다.
간이학교 조선어 독본 교과서. 당시 '국어'는 일본어였으며 한국말은 '조선어'로 불렸다.
간이학교 국어 독본 교과서. 당시 '국어'는 일본어였으며 한국말은 '조선어'로 불렸다.
일제강점기 간이학교 물리학 교과서.
임진왜란 때 안골포해전으로 유명한 안골에도 1908년 지역 유지들인 배창인, 이주향, 이득성 등이 수군만호진 청사에 경명학교(競明學校)를 설립했으며 경화동에는 1909년 김봉규 등 독지가들에 의해 대정학교(大正學校)가 설치됐다.
진해에서 이처럼 근대교육이 번져가고 있을 때 마산에서는 경남지역 신교육의 효시인 창신학교(昌信學校)가 설립됐다.
창신학교 초창기남녀학생.
창신학교 1924년신교사.
사립학교령에 따라 1909년 8월 19일 인가받은 창신학교는 영남의 명의 이승규(李承奎) 장로가 설치했다. 이미 1906년 당시 창원부 외서면 성호리의 교회당(후에 문창교회로 바뀜)에 병설 ‘독서숙’으로 시작됐다. 10여명의 아동을 모아 우리 민족의 역사를 가르치는 등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 1912년에는 고등과를 개설하고 1917년 호주 선교본부의 도움을 받아 의신(義信) 여학교를 개설하기도 했다. 이 창신학교는 일제 강점기 마산지역의 배일운동에 앞장섰으며 1930년대 후반 신사참배 거부로 1939년 7월 20일 학교 문을 닫아야 했다.
창신학교 1922년고등과6회졸업식.
창신학교 1회졸업장.
복음농업실수학교1회졸업생.
창원의 교육을 말할 때 빠뜨려서는 안될 것이 ‘노동 야학’이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한 축이기도 했던 창원의 노동운동은 이미 1900년대부터 싹텄다. 1920년대 들어 전국적으로 노동야학이 급속도로 확산했는데 마산에서는 1907년 7월 10일 당시 마산의 유지였던 옥기환, 구성전 둘이 돈을 내고 옥기환이 직접 교장이 돼 노동야학을 운영했으며, 창신학교 교사들이 야학 교사를 맡아 정열을 불태웠다. 여기서 배출된 청년 노동자들은 이후 3.1 독립만세운동의 중추역할을 해냈다.
1900년대 초 설립된 학교로는 마산성호초등학교(1901년 개교), 마산월영초등학교(1902년 개교·일본인 전용), 마산진동초등학교(1908년), 창원초등학교(1907년·창흥학교로 출발했다가 1915년 공립으로 바뀜), 창원상남초등학교(1908년·숭광학교로 개설해서 1922년 남면속수학교로 바뀌었으며 이듬해 공립 전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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