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았던 개화 파도만큼 거셌던 진해지역 항일 열풍

1919년 4월 29일 하오 1시 창원군 상남면 마산헌병대 사파정 출장소에서 서쪽으로 약 400m쯤 되는 진해~창원간 대로상에서 학생 청년을 중심으로 약 50여 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다.…헌병들이 허둥지둥 무기를 챙겨들고 시위 함성이 들리는 곳으로 달려갔으나 시위군중은 그림자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 난 뒤였다.…이 사파정 의거는 영남지역에 있어서는 3·1 독립만세시위의 마지막을 장식한 의거임이 틀림없다. <부산경남 3·1운동사> 사단법인 3·1동지회

일제 말 조선어 사용금지와 창씨개명, 조선인 징병 등을 추진하면서 '훌륭한 군대로 나가기 위해 국어생활을 실현하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발행 포스터.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독립만세 시위는 3~4월 두 달 정도 가열차게 타오른 뒤 소강상태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맨주먹으로 총칼에 맞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것으로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은 ‘로망’에 지나지 않으며 실질적인 독립을 얻으려면 만세운동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수많은 사람의 목숨 값으로 깨닫게 됐다.

3·1만세운동 주역 중에서도 변절하면서 일제에 빌붙기도 했지만 독립의 염원은 다양하게 분화하면서 새로운 사회운동으로 발전해나갔다. 종교는 일제 말기 신사참배 강요 전까지만 해도 독립운동의 한 근거가 됐으며 농민·노동·청년학생·여성 등 분야별 운동에다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 무정부운동 등 혁명 사상까지 가세하면서 독립운동은 발전적 분화라기보다는 ‘분열’로 보일 정도로 다양한 활동이 벌어졌다.

진해에서도 다양한 단체가 결성돼 활동했는데 기록상으로는 1915년 주병화가 중심이 돼 설립한 진해 청년회였다. 이후 1920년대에 들면서 대한구락부를 시작으로 1928년 웅천여자청년회에 이르기까지 21개 사회단체가 설립되는 등 일제하에서 모두 23개 단체가 결성돼 강연회·토론회 개최, 야학 설립과 도서관 운영 등 민족정신 고양에 힘썼다.

일본 오토바이병이 사용하던 보안경.

◇웅천읍 교회 = 웅천읍교회는 웅천읍성 서문 입구에 있어 호주 최초의 한국 선교사 데이비스가 1890년 4월 2일 거쳐 간 자리로 이로부터 16년 뒤 이 자리에 호주 선교사에 의해 교회가 세워졌다. 이 교회는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항일했던 주기철 목사를 키워낸 곳이다. 1906년에 웅천읍교회가 세워졌으며 주기철은 1915년에 세례교인이 된 후 이듬해 집사로 피택됐다. 현재 교회 내에 ‘주기철 목사 기념관’이 있으며 웅천교회와 가까운 북부동에 ‘소양 주기철 목사 순교 기념관’을 2011년 준공을 목표로 공사하고 있다.

◇웅동면 사무소 = 1919년 3·1운동 당시 소사리는 웅동지역 중심으로 ‘면사무소’가 있었다. 당시 소사리 모습을 한 선각자의 회고담에서 찾아보았다. “웅동면은 벽지 농어촌답지 않게 일찍부터 개화의 물결이 넘쳐 들어왔으니 이 또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름 아닌 4년제 사립 계광학교에 고등과 1·2학년을 더 두어 중학교 1·2학년 과정을 계속 공부시키는 식의 특수학교가 설립 운영됐다.” 1922년 당시 웅동면에서 외지로 유학나간 사람은 동경 2명, 경성 4~5명, 평북 정주에 3명으로 당시 벽지 농어촌치고는 꽤 많은 편이었다.

일제시대 고문기구(고정 혁대와 재갈).

◇주기철 목사 = 1897~1944. 기독교계의 대표적 항일 순교자. 웅천에서 태어나 정주 오산학교, 평양신학교를 거쳐 1925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젊은 시절 창원일원에서 ‘청년운동’을 했으며 1929년부터 신사참배 거부로 항일투쟁에 나섰다. 부산초량교회, 마산문창교회, 1936년부터는 평양신정교회에서 시무 중 5년 4개월 옥고 끝에 1944년 4월 21일 평양형무소에서 순교했다.

◇문석주 = 1899~1934. 웅천 3·1운동 주역으로 4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과를 졸업했다. 재학 중 도쿄 유학생회장을 했고 졸업 후 ‘도쿄 한국인 노동조합 총연맹’의 총무로 조선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대변자 역할을 적극적으로 했다. 1928년 고향 웅천에서 청년운동을 했는데 그 활동 범위가 경남 일대였다. 항상 고등계 형사가 그를 감시했고 1931년 징역 6개월에 2년간의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집행유예가 된 것은 그의 건강 악화에 따른 것으로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35세에 생을 마쳤다.

◇김조이 = 1904~. 웅천군의 마지막 군수였던 김재형(1864~1948)의 손녀로 태어났다. 1925년 허정숙(허헌의 딸), 주세죽(박헌영의 아내) 등과 같이 ‘경성 여자청년동맹’을 창립하고 일제강점기 여성 청년운동을 주도적으로 했다. 그 후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주의자로서 애국활동을 하게 됐고 조국 광복 후 남편 조봉암(농림부 장관, 국회부의장 등을 거쳐 이승만의 정적으로 사법살인을 당함)을 내조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됐다.

도움말·자료 / 김현철(김씨박물관 관장)

디지로그

경남도민일보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2017년부터 체육부에 와서 경남FC, 내셔널리그 등 축구를 담당하고, 겨울시즌에는 창원LG세이커스 농구도 담당합니다. 물론 전국체전이나 각종 아마추어나 학교스포츠도 맡아 합니다. 원래는 뉴미디어, IT 등에 관심이 많고, 그에 따른 글을 많이 썼습니다.

1 Response

  1. 정하태 댓글:

    웅천읍교회에 대한 근거 자료를 얻고자 합니다. 제 메일은 jhtnaver@naver.com 입니다. 연락처 010-6782-0691 정하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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