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유·장류·주류업, 창원 근대산업의 주춧돌

우리나라는 전래부터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직업 귀천이 있는 사회로 생산·유통을 담당하는 산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1876년 조선이 개방을 하고 부산을 시작으로 인천·원산항을 개항하면서 일본인·청국인 등이 그들 나라의 상품과 다른 서구의 문물을 들고 와 조선 시장을 급속히 잠식했다. 이 시기에 수입상품(공업 생산품)을 개항장에서 재래장사가 있는 농촌으로 옮겨 파는 일과 당시 재래시장의 물물교환 방식에 의해 취득한 곡물 등의 농민 생산물을 개항장으로 모으는 일을 하는 부보상과 개항장에 자리 잡은 객주, 여각을 운영하는 상인 등의 특권상인으로 변모하고 상회사(商會社)로 발전해 갔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1300만 명 정도로 농업 84.1%, 어업 1.1%, 공업 0.7%, 상업 6.2%, 광업 0.1%, 날품팔이 2.4%, 무직 기타 2.3%, 공무 자유업 3.1%로 전형적인 자급자족 농업사회였다. 당시 총 수입의 80%가 면직물이었고 수출의 55.7%는 쌀, 21.2%는 콩이었다. 그밖에 인삼 9.5%, 쇠가죽 3.4% 등이었다.

일제강점기 웅천지방에는 '웅천부인공려회(熊川婦人共勵會)'가 만들어져 면화생산 등에 함께 힘썼다. 공동경작지인 면화 재배지에서 기념촬영한 웅천 부인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 국가가 선진 서구 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서울에 기차, 전차가 등장했고 이 시기에 조선 정부에 의해 ‘식산흥업정책’이 시행되면서 이후 민간인에 의해 근대적인 각종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종로 백목전도가(1900년), 한성 제직회사(1901년), 김창덕직조사(1900년) 등을 시작으로 1911년 당시 민간 경영 공장은 270개소가 있었다. 이 중 자본금 5만 원 이상은 총 35개소였는데 모두가 일본인 소유였고 조선인 것은 자본금 2만 원 정도의 직물업 제혁업(피혁)을 제외하고는 1만 원 미만의 영세 공장이었다.

1901년 3월 29일 황성신문 기사를 보면 “제직회사는 정동식이 일본에서 염직 기술을 배우고 귀국한 강영우와 함께 설립한 것으로 면포와 불왜회를 제직하였는데 직기는 협폭 50좌 광폭 10좌로서 대규모의 공장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더욱이 기숙사 시설을 갖추고 여성 노동자를 고용하는 등 선진적인 경업기법을 채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일 150~160척을 생산할 수 있었다고 한다”라고 보도했다.

1910년 일본의 조선 병합으로 조선 경제를 그들 경제 틀 속에 넣기 시작했는데 그해 12월 조선인의 회사설립을 방해하는 ‘회사령 시행규칙’ 반포와 ‘토지조사령’ 시행은 한국인의 근대사회로 가는 돈줄을 조이는 도구가 되었다.

이후 1919년 3·1운동 여파로 조선총독부가 문화정책을 내세우면서 ‘회사령’을 철폐했지만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인의 발’인 고무신 산업을 제외한 다른 업종에서의 한국인 산업행위는 미미했다.

어린 시절 ‘계집애’들이 ‘고무줄 놀이’ 할 때 부르는 노래다.

“고무신 고무신 /우리나라 신 / 삼천 강산에 / 우리나라 신”

지금의 몽고간장은 1920년 야마다(山田) 장류 양조장을 모체로 하고 있고, 무학주조는 1927년 쇼와(昭和) 주류공업사를 모체로 하고 있다.

지금은 그 자취도 없지만, 1939년 설립된 ‘고려모직'(적산)과 1936년 설립된 ‘동양제모'(적산) 등은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960년대 초까지 마산에서 모방직계 섬유산업의 일익을 담당했던 주춧돌이었다.

이러한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빠질 수 없는 ‘여성노동자쟁의’도 거셌다.

1929년 만들어진 일본 동양제사(미쓰비시 계열) 진해공장. 1932년 당시 한국인 종업원이 400여 명 있는 대기업이었다. 이곳 여성 노동자들은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하루 12시간 노동으로 혹사당하자 기숙사 여성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기숙사의 난방개선, 점등시간 연장, 외출 자유, 식사 개선, 근무시간 단축, 차별대우 철폐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80여 년이 지난 요즘의 비정규직 노동자들 요구와 어쩌면 이렇게 닮았는지, 그간 역사가 발전하긴 한 것인지 의문이 드는 부분이다.

당시 여성 노동자들이 몰래 부르던 ‘한탄가’이다.

1절. 실 빼는 공장은 열두개 굴뚝 / 통하는 연기는 우리의 한숨

2절. 하루의 품팔이는 다만 5전 / 늙으신 부모를 어떻게 하리

후렴. 에헤라 요것이 설움이라네 / 에헤라 요것이 눈물이라네.

도움말·자료 / 김현철(김씨박물관 관장)

디지로그

경남도민일보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2017년부터 체육부에 와서 경남FC, 내셔널리그 등 축구를 담당하고, 겨울시즌에는 창원LG세이커스 농구도 담당합니다. 물론 전국체전이나 각종 아마추어나 학교스포츠도 맡아 합니다. 원래는 뉴미디어, IT 등에 관심이 많고, 그에 따른 글을 많이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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