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침략·침탈 역사 공존…아픈 흔적 오롯이
◇한국의 일본 침략사 = 일본 이끼섬(壹岐島)에는 ‘무쿠리 고쿠리’라는 인형이 있다. 예부터 우는 아이에게 ‘무쿠리 고쿠리 온다’고 하면 울음을 그칠 정도로 세대불문하고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여기서 무쿠리는 ‘몽고’, 고쿠리는 ‘고려’를 의미한다.
고려는 세계 제패의 야망을 키우던 몽고에 저항했지만 결국 1260년에 항복했다. 중국 대륙을 점령한 몽고의 쿠빌라이 칸은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바꾸고 일본 침략에 나서면서 고려에 그 임무를 맡겼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2호 몽고정. 창원시 마산합포구 자산동에 있는 우물이다. 고려 충렬왕 원년 (1281년) 원나라 세조가 여몽연합군에 의한 2차례의 일본 정벌에 실패한 뒤, 같은 해 10월에 남해안 방어를 위해 지금 마산 정수장 일대의 환주산에 군사를 배치하고 진을 설치하였다. 이곳에 주둔한 군사들에게 마실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이 몽고정이다. /경남도민일보 DB
1274년 10월 원나라 병사 2만 명, 고려병사 5000명으로 구성된 원정군은 900척의 배에 나누어 합포(合浦·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대마도와 이끼섬을 침공, 규슈 후쿠오카에 상륙했다. 철포라는 신무기를 앞세운 그들은 무서운 기세로 공격을 퍼부었고 군과 민간을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
이런 중에 대폭풍우가 발생해 병선 200여 척을 잃은 후 합포로 퇴각했다. 이 1차 침공을 문영의 역(文永의 役-분에이노에키)이라고 한다.
2차 침공은 1차 침공 때보다 5배가 넘는 14만 대군을 동원했으며 동로군(東路軍)과 강남군(江南軍) 둘로 나누어 출발시켰다. 동로군은 고려군과 원나라 강북지방의 병력으로 모두 4만 명으로 구성됐고 강남군은 원나라에 항복한 남송의 수군을 중심으로 한 강남지방 병력 10만 명으로 구성됐다. 1281년 5월 우선 고려의 합포를 출발한 동로군은 대마도와 이끼섬을 습격한 다음 하카타 만으로 진격했다. 그리고 히젠(肥前) 지방의 다카시마(鷹島)를 거점으로 삼고 강남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6월말 강남군이 도착해 7월말 하카타만에 진격한 후 다자이후를 향해 최후의 총공격을 결행하려고 하던 날 밤 또다시 폭풍우가 불어 원나라 범선 4000여 척을 덮쳤으며 대부분의 병사들을 삼키고 말았다. 당시 살아남은 배는 200여 척에 원나라 군대 14만 중 살아 돌아간 사람은 3만 명도 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 2차 침공은 홍안의 역(弘安의 役-고안노에키)이라고 한다.
남도에 들끓는 왜구로 민중의 삶이 피폐해지고 조운 체계마저 위협받자 세종 1년(1419) 삼군도체찰사 이종무가 병선 227척 군사 1만 7286명을 이끌고 거제도를 출발, 대마도를 정벌했다.
당시 선박 129척을 빼앗고 가옥 1939채를 불태웠으며 114명을 참수하고 포로 21명과 중국인 피로인 131명을 찾아 귀환했다. 이 대마도 정벌을 계기로 왜구가 근절됐으며 통교체계가 확립됐다.
◇일본의 한국 침략사 = 한국의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에서는 아이를 어를 때 ‘이비~’ 또는 ‘에비~’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의 어원은 이비(耳鼻) 즉 왜란 때 일본군이 귀와 코를 베어간데서 유래한 것으로 한국인의 의식에 박혀있는 일본의 잔혹함을 상징한다.
13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서 동아시아 해역을 무대로 해적행위를 했던 ‘왜구’가 사료에 처음 등장한 때는 고려 고종 10년(1223)의 일이지만 한반도를 본격적으로 침탈하기는 1350년 2월부터로 이후 수십년에 걸쳐 끊임없이 고려·조선을 괴롭혔다. 이로 인해 조운제도를 위시한 제반 행정체제에 큰 혼란을 초래했으며 약탈과 납치행위로 민중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고려 공양왕 2년(1390)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제포성지. 지금 남아있는 제포진성은 1436년 제포를 개항한 후 왜인의 불법 이주를 막고자 1437년 합포에 있던 수군검절제사영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쌓았다고 한다. /경남도민일보 DB
태종7년(1407) 내이포(乃而浦 또는 薺浦·창원시 진해구 웅천) 부산포(富山浦·부산) 두 곳을 대일 무역항으로 개항하고 1426년 염포(鹽浦·울산)를 개항하면서 왜인을 통제하고자 ‘왜관’을 설치해 ‘삼포왜관’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점차 삼포에 거주하는 자가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외교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1510년 4월 ‘제포’를 중심으로 한 왜인 4000~5000여 명이 대규모 폭동을 일으키면서 ‘삼포왜란’이 일어났다. 이 왜란은 15일만에 진압됐지만 이로 인해 부산포를 제외한 제포 염포는 폐항됐다.
1592년 4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 휘하의 소요시토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조선침략 1군이 부산진성을 공격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됐다.
15만 8700여 명의 육군 정규 병력 외에 수군 9000명, 후방 경비병 1만 2000명 등 20만 명의 병력이 4~5월 사이에 부산에 상륙해 국토를 중로·좌로·우로의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한 20일 만에 서울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그들의 목적인 ‘명나라 정복’의 교두보인 조선을 확보했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 수군 전선은 250여 척 정도였다. 전쟁 초기 경상도 수군이 대패했고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도 수군은 옥포·합포·사천·당항포·율포·한산도·안골포·부산포 해전에서 연전연승했다.
사천해전에서 거북선이 처음 등장해 효능을 입증했고 한산도 해전에서는 학익진을 펴 적선 60척을 부수거나 포획하는 대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두 해전 승리로 제해권을 장악해 일본군의 서해 진출을 막을 수 있었고 부산포 해전에서 본거지를 습격당한 일본군은 해전을 기피하고 육전으로 전환했다.
도움말·사진/김현철(김씨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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