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바고에 대해
(2007년 8월 8일 엠바고에 대해 썼던 글이 있어 다시 전송합니다.)
어제(7일)까지는 아프간 피랍 샘물교회 신도들로 인해, 오늘은 남북정상회담으로 인해 언론에서 비중있게 다루지는 않았지만 조·중·동·문(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문화일보)을 비롯한 거대 언론과 정부가 힘겨루기를 하는 주요 사안 중에 ‘엠바고(보도시점 제한)’가 있습니다.
정부가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이라고 이름 붙인 언론의 취재 관행에 중대한 변화를 불러올 체제를 바꾸려는 내용 중에 ‘엠바고’나 ‘비보도 요청(흔히 ‘오프 더 레코더 off the recorder’라고 합니다)’을 어긴 언론사에 대해 제재를 가하는 내용이 들어갈 전망입니다.
정부 스스로가 총리훈령인 ‘취재지원에 관한 기준’에 엠바고 요청을 이행하지 않은 언론사 및 기자에게 자료 제공이나 인터뷰 거부 등의 불이익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명문화 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엠바고나 비보도 요청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쓰기에 따라서는 국민의 알권리 충족과 생명·재산 보호 등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쓰기에 따라서는 국민의 생명·재산 보호와는 거리가 멀고 언론사·기자나 특정 세력의 이익 도모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지역의 일을 예로 든다면 이렇습니다. 경남도와 마산시가 창포만 일대를 매립해 조선산업단지로 조성할 예정인데 발표가 되고나면 주변 땅값이 들썩이고 투기 바람이 몰아칠 것으로 전망된다 합시다. 사안 자체가 중대하고 복잡한데도 이를 취재·보도할 기자들에게 발표 시점까지 숨기고 있다가 갑자기 발표했다 칩시다. 그러면 기자들이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보도를 하게 되고 숱한 오보를 낳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럴 때 경남도는 출입기자들에게 특정 시점까지 엠바고를 요청한 뒤 충분한 자료를 제공하고 사전 설명도 합니다. 모든 언론이 이를 잘 지킨다면 대형 프로젝트를 수행하는데 국민들의 알 권리도 충족시켜 주면서 불필요한 낭비 없이 일이 진척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중의 특정 기자나 언론이 엠바고 요청을 묵살한다면? 만약 오늘 오전 10시가 엠바고 시한이었는데 오늘 아침 조간신문(늦어도 아침 6시까지는 독자에게 배달됩니다)에 보도해버리면 그날 석간신문이나 방송으로서는 이른바 ‘물 먹은’ 게 됩니다. 자연 후속 보도 경쟁이 가열되면서 여러 부작용을 낳을 수 있겠지요.
또 특정 기자가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을 시켜 인근 목 좋은 곳의 땅 매입에 나선다면? 일부 기자라는 사람들이 부동산 투기를 막기는 커녕 스스로가 투기에 나서기도 해왔습니다.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되겠지만 지금까지 왕왕 있었던 일이고, 오늘 아침에도 이와는 사정이 다르지만 엠바고는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청와대는 오늘 새벽에 출입기자 전용 웹사이트를 통해 10시에 남북정상회담 합의 사실에 대한 브리핑이 있을 예정이며, 10시 전까지는 어떠한 형태의 예고 보도도 안된다는 엠바고 요청을 했습니다.(이 내용은 한참 뒤에 청와대 출입기자에게 들은 얘기입니다) 그런데도 9시를 전후해서 엠바고는 깨어졌습니다.
저는 한참 바쁘게 인터넷 신문을 편집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인터넷 라디오를 들으며 편집 중이었는데, 갑자기 “오는 28일부터 사흘간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한답니다. 10시에 뉴스 특보로 상세한 내용을 알려드리겠습니다”는 내용이 흘러나왔습니다.
당황한 저는 하던 일을 멈추고 제휴 통신사 사이트를 뒤져 같은 내용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idomin.com 머리로 ‘[긴급뉴스]남북정상회담 28일부터 평양에서’라는 제목으로 내용도 없이 배치했습니다. 그게 9시 27분 59초였습니다. 이후는 11시 넘게까지 숨가쁘게 진행됐습니다.
대충 정리가 되고나니 청와대 출입기자에게 조금 화가 났습니다. 엠바고 요청이 있었다 할지라도 담당 데스크나 뉴미디어팀에 귀띔이라도 해줬더라면 미리 기다릴 수 있었기에 그처럼 정신없이 바쁘지는 않았을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화해서 물었더니 앞에 얘기한대로 흘렀더군요.
저는 오늘 아침 엠바고가 무너진 것이 정부의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에 포함될 ‘엠바고’ 관련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매체별로 발행 시점이 다른데서 생긴 과당경쟁 때문이라고 봅니다.
오전 10시에 발표한,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메가톤급 뉴스를 12시께 배달되는 석간신문이 보도하지 못한다면 독자들은 그 신문이 낙종했다고 생각할 겁니다. 독자들은 이미 방송매체나 인터넷을 통해 다 알고 있는데도 그 뒤에 석간에 반영되지 않았다… 상상도 하기 싫은 상황입니다.
발행 시점으로 인한 문제는 우리 지역에서도 숱하게 있어왔습니다. 대표적인게 경남도교육청의 교원 인사 발표입니다. 오전 10시에 발표하면 석간신문에서 조금 노력하면 그날치에 보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간신문은 뒷날 아침이 되니 석간보다 하루가 늦게 보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11시 이후에 발표하면 조간은 여유있게 보도하겠지만, 석간은 독자들 보기에 낙종한 것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실제 발표시점을 두고 도교육청 기자실 테이블이 뒤엎어지고 하는 소동도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리하여 절충안으로 나온 것이 매년 3·9월 두차례 정기 인사가 있는만큼 한번은 오전에 발표하고 한번은 오후에 발표하는 것이었고, 아직까지도 그대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인터넷 매체 발달로 인해 신문에 교원인사 명단을 게재하지 않는데도 이같은 속보경쟁의 결과가 지켜지고 있는 셈이지요. 좀 다른 얘깁니다만, 교원인사 발표하는 날은 idomin.com도 접속자 폭주로 서버가 다운된 일이 있을 정도로 관심도가 매우 높은 일입니다.
하여튼, 오늘 아침에 엠바고는 1시간 정도 먼저 보도하는 매체로 인해 깨어졌습니다. 도교육청 인사 예에서 봤듯이, 앞으로도 이런 속보경쟁으로 인해 엠바고가 무너질 일은 부지기수라는 점입니다. 사실 방송이나 인터넷 언론은 엠바고를 그대로 지키더라도 크게 손해볼 일은 잘 없습니다. 그보다는 하루 한번 발행하는 신문은 방송과 인터넷 언론 영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엠바고 파기의 유혹을 더 강하게 받을 것입니다.
이런데도 정부가 ‘엠바고 파기시 자료 제공이나 인터뷰 거부 등의 불이익’을 주겠다는 것은 현실감이 없어보입니다.
정부가 오늘치 국정브리핑에서 밝힌 여러 내용을 충분히 감안한다 하더라도, 오늘 아침 깨어진 엠바고 사례만 보더라도 정부의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 중 ‘엠바고’ 관련 내용은 크게 고쳐야 한다고 봅니다.
2007.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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