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노동을 만나면?

‘파업전야’가 기념비적인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건, 이 작품을 둘러싼 논란 때문만은 아니다. 실제 파업 중이던 인천의 한 공장에서 한동안 꺼두었던 기계를 다시 돌려가며 촬영한 영화는 지금 봐도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승진시켜주겠다는 회사의 회유에 갈등하는 주인공, 노조를 만들려는 핵심 노동자들, 대학생 출신 위장취업자 등 전형적인 인물들이 출몰하지만, 리얼리티의 밀도가 높아 전혀 진부하지 않다. 노동자들이 사용하던 은어와 음담패설 등이 영화를 풍성하게 하는 건 물론이다. – 한겨레2008년 9월 23일 자 ‘전설의 파업전야 DVD로 부활하다’ 기사 중.

이른바 ’87년 체제’. 1987년 6·10 항쟁과 잇따르는 8~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를 주요한 골자로 하는 현재의 헌법 체제는 이미 낡았으므로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른바 ‘체제 개편’에 대한 요구는 지난 대선 무렵부터 화두가 됐지요. 그렇지만 당시 청춘을 역사와 민족에 바치겠노라며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천했던 이들에게 ’87년 체제의 종말’이라는 말은 온갖 감회를 불러일으킵니다.

사실 1980년대 중반까지 대학 교문은 자욱한 최루가스와 날아다니는 ‘짱똘’에게 점령당했습니다. 그러나 87년 이후 최루가스와 ‘짱똘’을 대체한 볼트·너트와 지게차까지 동원된 ‘전쟁터’는 산업 현장으로 확산됐지요. ‘강단 좌파’ ‘학삐리’ 자리를 생산현장의 노동자들이 대체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후에도 군부 독재를 물리치고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달성하고자 하는 지난한 투쟁은 계속됐고, 그 결과가 지금의 ’87년 체제’입니다. 그 과정에서 반독재 민주화를 이루려는 다양한 투쟁이 벌어졌는데 그 중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분야 중 하나가 문화운동이었습니다. 1988년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독립영화 <오! 꿈의 나라>를 제작했고 1990년 <파업전야>, 1992년 <닫힌 교문을 열며>를 제작한 ‘장산곶매’는 영화를 통해 그런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장산곶매의 영화 3편은 전부 정부로부터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고, 그러다보니 영화를 상영한다는 자체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 되는 상황이 속출하기도 했습니다. 나도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하고서는 대학에서 <오! 꿈의 나라>를 상영하려다 정보기관으로부터 온갖 회유와 협박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날 밤, 영화 상영 현장을 덮친 경찰을 피해 영화 필름 통을 들고 학교 뒤 야산을 뛰어 달아났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폐부를 깊숙이 찔렀던 <오! 꿈의 나라>가 한국 현대사의 큰 비극이었던 광주항쟁을 직접적으로 다룬 영화였다면 <파업전야>는 노동현장의 생생한 현실과 목소리를 담아냄으로써 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우리 사회의 주역으로 우뚝 선 노동자의 삶과 투쟁을 그려낸 영화입니다. 당연히 정부는 상영을 금지했고, 다시 필름 통을 들고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 재연됐지요.

이후 전교조 투쟁을 그린 <닫힌 교문을 열며>에 이르기까지 장산곶매가 제작한 3편의 영화는 종합예술인 영화가 사회의 진보를 위해 복무하는 모범을 보여줬습니다. 히틀러가 나치 체제를 공고히 하고자 적극적으로 활용한 영화가 나치 체제를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리는 역할을 했던 것과 같은 흐름이라고 봅니다.

창원대학교 이성철(사회학과)·이치한(중국학과) 교수가 함께 낸 <영화가 노동을 만났을 때>가 다루고 있는 영화는 미국 대공황과 주변부 노동자들을 그린 윌리엄 웰먼의 <베가스 오브 라이프(Beggars of Life)>를 비롯한 노동영화 15편입니다. 그 중 한국 영화 2편이 눈길을 끕니다. 박광수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장산곶매의 <파업전야>가 그것입니다. 그밖에도 동양의 일본영화 고바야시 다키지의 <게공선>과 중국영화 양야우저의 <미꾸라지도 물고기다>와 지아장커의 <24 시티>도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작업의 전 과정에 대해서도 별다른 전문성이 없는 그저 영화를 좋아하는 여러 씨네필(cinephile)들 중의 한명일 뿐”인 노동과 인문학 전문가인 두 저자는 가장 대중적이며 자본주의적인 속성의 ‘영화’라는 매체가 우리의 ‘노동문제’를 어떻게 나타내고 있는지에 대해 전문가가 아니기에 할 수 있는 신선한 영화비평을 깊이 있고 풍부한 해석으로 보여줍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15편 영화는 이미 국내에 소개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배경도 한국, 미국, 영국,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중국 등 다양합니다. 저자들은 이런 영화에서 표현되는 내용을 연대기 순으로 편집했습니다. 자본주의의 전일화 과정이 국가별 특수성을 띠기도 하지만 보편적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저자 서문을 인용합니다.

“이 책을 통해 노동이라는 오랜 친구이자 삶의 근간을 기억하고 전망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것이 필자들의 소박한 희망이다.”

<영화가 노동을 만났을 때>
이성철.이치한 지음, 366쪽, 호밀밭, 1만 7000원.

디지로그

경남도민일보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2017년부터 체육부에 와서 경남FC, 내셔널리그 등 축구를 담당하고, 겨울시즌에는 창원LG세이커스 농구도 담당합니다. 물론 전국체전이나 각종 아마추어나 학교스포츠도 맡아 합니다. 원래는 뉴미디어, IT 등에 관심이 많고, 그에 따른 글을 많이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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