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사퇴, 왜 6.29 선언이 생각날까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난다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다지 반갑지 않다. 한번 호되게 사기를 당한 기억 때문이다.

1. 87년 6월 항쟁의 성과를 도둑질한 6·29 선언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간접 선거로 뽑겠다는 전두환이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거센 저항 앞에 무릎 꿇게 만든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 노태우의 6·29 선언이었다.(왜 내가 이건희 회장이라고 하면서도 전두환, 노태우는 이름만 부르고 뒤에 호칭을 붙이지 않는지 까닭을 알고 싶으면 <반란 수괴 전두환을 기리겠다고?> 포스트 참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와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이미 군사 쿠데타 세력은 총칼로 5월 광주를 재현하지 않고는 권력을 고스란히 내놓고 역사가 아니라 실정법 단죄를 받을 수밖에 없는 국면으로 내몰렸다. 4월 13일 호기롭게 ‘호헌’을 천명했던 전두환은, 뒤에 드러난 일이긴 하지만 노태우를 살짝이 불러 항복선언문을 낭독하라고, 쇼를 하라고 연출했다.

그리하여 나온 직선제 개헌 수용을 골자로 하는 6·29 선언이었다. 국민은 열광했으며, 이제 드디어 군부 독재 권력을 몰아내고 민주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민주화 세력은 적전분열했으며, 노태우는 어렵지 않게 직선으로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그 5년만 해도 징그럽고 소름끼치는데, 3당 합당이라는 해괴한 놀음으로 군사반란세력과 그의 추종세력, 범 잡으러 범 굴로 들어간다고 큰소리쳤던 기회주의 세력의 연합은 5년을 더 권력을 쥐고 흔들었으며 기억만으로도 몸서리쳐지는 IMF 구제금융 시대를 불러왔다. 그런 모진 고난 끝에 이제야 절차적 민주주의나마 누릴 수 있게 됐다.

결국, 4000만 국민은 전두환 연출 노태우 주연의 깜짝 사기 쇼에 눈이 휘둥그레져 10년 세월을 도둑맞았던 것이다.

1. 국민을 혼란에 빠뜨려 위기를 벗어나려는 ‘꼼수’

나는 대선 정국이 한창이던 지난해 11월에 <이른바 ‘삼성공화국’을 보는 눈>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당시 내 생각의 핵심은 이미 국가권력으로도 제어할 수 없게 된 거대 자본을 최소한의 합리성과 도덕성이 관철되는 자본으로 바꿔내지 못한다면 대선에서 그 어떤 후보가 당선된다 하더라도 별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지난주던가 삼성 특검이 수사결과를 발표한다 해도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으며, 내 생각이 크게 어긋나지 않아 몇몇 상징적인 내용은 있었지만 본질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오늘, 이건희 회장은 특검 수사결과 발표에도 누그러지지 않는 반(反) 삼성 정서의 물결 앞에 최강수를 뒀다. 자신이 회장직에서 물러나고, 그동안 족벌 경영의 수단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아왔던 전략기획실을 해체하며, 경영권 승계를 할 것이 확실시되는 이재용 전무도 고객총괄전무(CCO) 자리에서 물러나 국외 경영 현장 경험을 더하고자 백의종군의 길로 나선단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당장 경제계나 국민에게 충격을 줘 일의 본질을 놓치게 하는 충격 효과를 주는 것일 뿐 실질적인 삼성 개혁과는 거리가 먼 조치라고 본다.

순환출자 구조 개선에 대한 개혁방안이 전혀 없으며, 지금까지 경영권 불법 승계를 위해 취해 놓은 온갖 장치들을 되돌리거나 없애겠다는 약속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길어야 몇 년 국외에서 ‘황태자’로서 숨 고르기를 한 뒤, 적절한 시점에 이재용 전무가 경영 일선에 복귀할 것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그룹에 대한 지배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1. 이재용 전무는 반드시 삼성왕국 ‘황제’로 복귀한다.

그리 많은 시간도 필요 없다.

여기서 나는 20여 년 전의 악몽 같은 그날을 생각한다.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8가지 약속을 했다. 이후에도 노동자의 투쟁은 계속됐지만 6월 거리를 메웠던 넥타이 부대는 이런 개량화 조치에 포섭됐고, 몇몇 고비는 있었지만 노태우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삼성은 김용철 변호사가 처음 비리를 폭로했을 때, 오히려 역공을 취했다. 그동안 ‘떡값’으로 매수해뒀던 우리 사회 엘리트 집단은 그런 삼성의 든든한 우군이 돼줬다.

1985년 2.12총선에서 국회로 진출한 야당과 재야세력은 전두환의 정통성과 도덕성을 물고 늘어졌고, 급기야 박종철 열사가 고문을 받다가 숨지는 사고가 났는데도 “탁 치니 억 죽더라”는 희대의 웃음거리가 될 변명으로 일관했다. 언론은 그런 군사 반란세력의 충실한 우군이 돼줬다.

전두환 반란세력은 몇몇 자충수로 직선제 요구에 가세하는 국민이 많아지고 위기로 내몰리자 일체의 개헌 논의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4.13 호헌조치’를 취했다. 삼성은 김용철 변호사와 정의구현사제단의 공격 앞에 궁지로 몰리자 되려 김 변호사와, 삼성에 비판적인 언론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하느니 어쩌니 하면서 강공 드라이브를 걸기도 했다.

그럼에도, 전두환 반란세력을 몰아내겠다는 국민적 염원은 6월 뜨거운 아스팔트를 점령했고, 6·29 선언으로 유화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갔다. 삼성 특검 결과는 ‘탁 치니 억 죽더라’는 재방송에 불과하다. 이번에 국민은 아스팔트가 아니라 온라인을 점령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댓글과 트랙백, 토론 게시판은 삼성이 뭔가 특별한 조치를 할 수밖에 없도록 압박했고, 이건희 회장은 일반적으로 예상해왔던 것보다 훨씬 강력한 것처럼 위장한 대책을 예정보다 앞당겨 깜짝쇼로 발표하게 했다.

6·29 선언 뒤 군사반란세력에 맞설 민주화 세력은 적전 분열을 일으키지만, 민주정의당이라는 전혀 정의롭지 못한 지분을 그대로 갖고 있던 반란세력은 몇 번 고비는 겪었지만 결국 정권을 재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삼성은 순환출자를 통한 지배구조의 고리를 그대로 둔 채로 이건희 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이재용 전무가 백의종군의 길로 나선다고 했다. 앞으로 몇 번의 고비는 있을지 모르지만 이재용 전무는 반드시 ‘총수’로 복귀할 것이다. 주변 여건은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될 당시보다 더 좋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치는 2MB가 있고, 이미 너무 많이 개방돼 버려 언제든지 외국 투기자본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열려 있다 보니 ‘국가대표 기업을 살려야 한다’는 정서에 호소하며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되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사기라고 본다. 한번 당한 사기 또 당하면 안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삼성 그룹을 이건희 회장이나 이재용 전무가 지배하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지배하려면 그만큼의 지분을 갖고 하라는 것이다. 상속하려면 제대로 상속세 내고 하라는 것이다. 지분이 안된다면, 세금 아까워서 상속 못 하겠다면 전문 경영 능력으로 그 능력 범위에서 경영을 해야 한다. 꼼수로, 탈법으로, 편법으로 전횡하는 일은 이제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관련글 : 2007/11/27 – [주절주절] – 이른바 ‘삼성 공화국’ 정국을 보는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