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왜 이리 눈물이 날까요

해마다 돌아오는 추석이건만, 올해 추석은 이상하게도 자꾸만 옛날 일이 생각나고, 눈물이 글썽해집니다. 아직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생각할 나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상하게 지난 날을 자꾸만 되돌아보게 됩니다.

외할머니 무덤입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집에서 차례를 못지내고, 무덤에 찾아가서 차례를 지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장남이고, 어머니는 외할머니께 작은 딸입니다. 이렇게 장모 차례를 챙겨주시는 아버지도 대단하십니다.

가정사를 얘기하자면 깁니다. 내 외할아버지께서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인텔리였습니다. 해방 전 하동군 서기로 일하기도 하셨지요. 해방되고는 인민위원회에도 관여했고, 지리산 빨치산 투쟁도 했답니다. 대대적인 토벌이 시작되자 진주시내로 몰래 숨어들었다가, 기생이던 여인하고 정분이 나 부산으로 도망가서 살았습니다. 그 사이에서 3남 1녀를 낳았습니다.

이때문에 외할머니께서는 청상 아닌 청상으로 반평생을 살아오셨지요. 외할머니는 이모와 어머니를 낳으셨습니다. 그리고, 두 딸만 바라보고 사시다가 이모집에 형이 태어나고, 내가 태어나니 외손자를 바라보고 사시기도 했지요.

돌아가셔서는 그래도 외할아버지와 나란히 눕고 싶어 자리를 미리 마련해뒀지만, 외할아버지는 부산에 있는 납골당에 모셔지고, 외할머니 옆 자리는 이렇게 휑하니 비어 있습니다.

외할머니 무덤가에 자라는 모시입니다. 지금의 무덤 자리는 외할머니께서 호구지책으로 가꾸셨던 밭이었습니다. 모시도 하고, 배추고 심고, 마늘이니 소풀이니 기르시던 밭이었지요. 무덤 앞에 모시가 아무도 돌보고 거두는 이 없는데도 아직도 흐드러지게 세력을 이루고 있네요. 어린 모시잎은 살짝 쪄서 쌈을 싸먹기도 했는데, 아무도 보살피지 않으니 벌레가 먹어 쌈 싸먹을 정도로 성한 잎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이 모시가 외할머니 이를 다 상하게 했지요.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외할머니 가슴을 본 적이 있습니다. 목욕하신다고 등을 밀어달라 하셨지요. 그 때 외할머니는 환갑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는데, 가슴이 어머니보다 더 탱탱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는 온통 흠이 나고 빠지고 해서 볼품 없었습니다. 모시를 다루면서 이로 끊고 다듬고 하다 보니 그리되셨겠지요. 할머니 돌아가신지는 10년이 다돼가는데, 모시는 아직도 생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할머니 무덤에서 바라본, 할머니께서 40년 이상을 외로이 살아오신 집입니다. 사람 손길이 미치지 않다 보니 마당에는 쑥부쟁이 무성하고, 마당 단감나무에 달린 단감도 물러터져 떨어지고 있으니 서글픔만 더합니다. 마당에 제초제를 치면서 가슴이 뻥 뚫리는 듯 한데, 난데 없는 한기에 부르르 어깨를 흔들었습니다.

할머니 댁에서 바라본 들판입니다. 나락은 때가 다됐다는 듯 누런 빛을 띠어가며 고개를 숙여가고 있네요.

수세미 열매와 꽃입니다. 내가 외숙모라고 부르는(시골 동네 촌수는 참 복잡합니다. 이쪽으로 따지면 누나고, 저쪽으로 따지면 아지매입니다.), 사실은 외당숙모 집에 열린 수세미 열매입니다. 수세미가 해소.기침에 특효약이라고, 외숙모께서는 금방 수세미 열매를 따 주실 듯이 하면서 담배 끊으라고 신신당부 하십니다. 외숙모는 외할머니와 같은 동네에 사시면서, 치매 걸린 숙모(내 외할머니) 보살피시느라 많이 늙으셨습니다. 손사래 치고, 현관 나가시는 외숙모 잡아 겨우 수세미 따는 것은 말렸습니다.

외숙모께 들은 얘기인데 수세미 열매를 고아 먹는 것도 좋지만, 수세미 나무를 가을에 땅에서 50센티미터 정도 남기고 자른 뒤, 그 줄기를 병에 연결해 올라오는 수액을 모아 마시는게 가래 기침에 특효약이랍니다. 외삼촌께 해드려 효과를 톡톡히 봤답니다.

외숙모 집 앞에 있는 방아 꽃과 은행 열매입니다.

외가에 갔다가, 내 고조부부터 아래로 모셔진 납골당에 가서 성묘를 했습니다. 납골당 앞에는 녹차밭이 제법 있습니다. 원래는 녹차밭이 400평 남짓 했는데, 납골당 지으면서 많이 뭉개지고 지금은 얼마 되지 않지요. 그저 부모님과 내 4형제 가용으로 쓸 정도만 거두고 있습니다.

녹차 꽃이 예쁘게 피었네요. 조금 더 있어야 온 녹차밭이 꽃으로 뒤덮일 듯 합니다. 녹차는 지금 꽃이 피면 겨울에 열매가 맻혀 내년 이맘때 쯤 열매가 익지요. 꽃과 열매가 동시에 달려 있는 종자입니다.

그 녹차밭에 적하수오 넝쿨이 뒤덮고 있습니다. 한 뿌리 캐어봤더니 이렇네요.

아마 2-3년쯤 된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남들이 다 캐 간다고, 남이 캐기 전에 우리가 캐자고 말씀하시고,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캐 가는 걸 어쩌겠느냐며, 약효 안든 걸 캐느니 그냥 놔두자고 우기던 중 나와 내 아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 해서 한 뿌리만 캐어봤습니다.

이 적하수오 줄기를 잘라다가 진주 산과 밭에 많이 옮겨 심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누군가가 포크레인까지 동원해 모조리 거둬 가버렸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산에 두면 남의 것이라며 캐자고 우기셨지요. 그래도 그냥 뒀습니다. 굳이 임자가 있다면 캐 갈 것입니다.

납골당은 한 2년 전부터 공을 들인 보람이 있어 잔디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더군요.

디지로그

축구가 좋은 축구입니다.

2 Responses

  1. 파비 댓글:

    빈무덤… 정말 드라마 같은 이야기군요. 저는 조상대대로 고향이 창원군 웅천면(호적 떼면 거기 원적으로 나오더군요)이고 지금도 그 일대에 일가들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만, 우리 아버지는 목포에서 병원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형이 거기 있거든요. 추석 때 잠시 퇴원 했다가 바로 입원 하셨지요. 아버지는 동란 때 참전용사로서 훈장을 세 개나 타신 분이십니다. 은성무공훈장, 충무,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말하자면 전쟁영웅이죠. 그러나 사는 건 참 비참하셨다고 말해야 할 정도였고, 배운 게 폭파(특수부대 출신이셨고, 제대는 맹호부대에서 하셨음) 밖이라 광산에 가서 주로 발파감독 같은 걸 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지금 모습은 과거의 용사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 걷기도 힘겨워하는 초라한 모습입니다. 기자님의 외할아버님과는 상반된 곳에서 총을 드셨겠지만 말이지요. 그래서 추석 때는 목포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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