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세 논의 제대로 해 제대로 된 복지 누리자

얼마 전 경남메세나협회가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기업체 등을 선정해 메세나상을 줬습니다. 상 심사과정에 참여해서 그들의 공적을 살펴보자니 하나같이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습니다. 그런 경제적 지원 아래 경남의 문화예술이 한걸음씩 발전해 나갈 것이라 기대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만 따져보면, 기업의 문화예술에 대한 기부나 그밖에 각종 성금·기부 같은 것이 한 때는 ‘준조세’라는 비판을 받았던 적도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세금은 법률에 근거해 마련된 합당한 기준에 따라 부과되고 납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법률이 아닌 사회 통념이나 그 밖의 정치적·사회적 이유로 내키지 않는 재화를 사회에 내 놓는 것을 두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좋게 볼 여지가 없지는 않지만, 그렇게 썩 권장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이뤄지는 기부는 오로지 기부자의 의지-기분에 따라야 하기에 지속가능하지도 않고 재화의 분배도 합리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지난 10월 26일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 결과를 두고 국민의 복지 욕구가 확연하게 드러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야권에서는 무상급식에 더해 무상보육·무상의료·반값 등록금을 의미하는 ‘3+1’안을 가다듬고 있습니다.

정부가 재정을 확충해 복지나 문화예술분야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기조는 이미 형성됐습니다. 여기에는 현재의 재정 상태로는 복지 확충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있습니다. 현재의 저출산·고령화 추이를 고려한다면 현재의 복지수준을 유지하더라도 추가적인 재정 소요가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MB정부 이래 국가 경제는 성장하는데 국민 대다수는 가난해지는 ‘빈곤화 성장’으로 가고 있습니다. 야권에서는 복지 확대를 위해 이명박 정권의 부자감세 철회와 4대 강 등 낭비·선심성 예산을 절약하면 복지 수요에 대처할 수 있다고 했지만, 최근들어 증세 논의에 발을 담근 것만 봐도 기존의 구조에서 예산 절감만으로는 답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대외적인 요인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미 세계 경제의 ‘더블 딥’ 우려가 만연해 있고, 사실상 고성장 시대가 끝나고 저성장 시대가 지속될 것이라는 전문가 진단도 잇따르고 있습니다. 결국 재정 확대를 통한 ‘큰 정부’로 이 위기 국면을 타개해 나가야 한다는 공감대도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부자 증세’가 큰 화두입니다. 2008년 이후 고소득층에 대한 소득세를 인상했던 영국·그리스·스페인 외에도 미국과 일본이 세제 개편을 통해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미국은 2013년부터 2% 부유층에게 부여하던 감세를 폐지하겠다고 밝혔고, 연소득 100만 달러 이상인 부자의 최저세율을 규정한 ‘버핏세’도 제안돼 있습니다. 일본도 2010년대 중반까지 현행 5%인 부가가치세를 10%로 인상해 세수를 늘리겠다고 합니다. 최근 재정 적자로 위기설이 돈 프랑스는 최소 100억 유로 규모의 부자 증세와 감세 혜택 중단을 통해 재정 적자 감축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증세 논란이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논의의 방향이 이상합니다. 이른바 ‘부자 증세’라고 하는 방안을 내놓은 진정성은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밖에 전반적으로 손봐야 할 OECD 수준에 비해 낮은 소비세 세수 비율, 수평적 담세 형평성 같은 논의가 빠졌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 쪽에서는 근로소득자의 40%가 소득세를 내지 않는다는 식으로 ‘부자 증세’ 방어논리를 펴기도 합니다.

세금은 근본적으로 정치적입니다.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에서 과감하게 증세를 주장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정치권이 먼저 증세를 들고 나온 것은 그만큼 다급하다는 방증일 겁니다. 표는 얻어야 하고, 세금은 더 거둬야 하는 처지에서 들고 나올 수 있는 카드는 ‘부자’ 증세가 손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증세는 자칫 포퓰리즘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징벌적’ 부자 증세가 아니라 지난 10여 년간 해마다 세제를 손질했으면서도 근본적 개혁을 하지 못했던 세제 전반을 손보고 합리적인 사회적 합의에 기초한 증세를 이끌어내야 할 때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여러가지로 규정할 수 있겠지만, 소득이 있는 곳에 과세한다는 것도 중요한 원칙입니다. 상대적으로 ‘유리지갑’인 근로소득자만 옥죌 것이 아니라 그동안 소득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고소득 전문직이나 자영업자, 아예 과세의 손길이 미치지 못했던 지하경제나 종교계 등에 대한 과세 방안 마련 같은 것도 충분히 검토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부자들의 반감만 불러일으킬, 부자들에 대한 반감만 부추기는, 그리하여 상위 1%와 99%간의 적대감만 심어놓으려는 ‘징벌적 부자 증세’ 구호가 아니라면 세제개편을 통한 증세와 재정 건전성 강화에 반대할 이유는 없습니다. 경제협력기구(OECD) 평균 수준을 크게 밑도는 소득세를 끌어올리고 자본이득세를 신설하는 데 반대할 이유는 없습니다. 물론 합리적인 부자 증세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문제입니다. 문제는 선거를 앞둔 정치권에 이런 논의를 요구해봤자 표를 의식한 임시방편밖에는 나올 게 없다는 것입니다. 전문가와 학계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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