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안의 이방인과 함께한 8시간동안의 밀양 여행

3월 28일 토요일 오전 9시. 밀양시청 마당에 여러 국적을 가진 사람 14명이 모였다. 오스트리아 빈에 살면서 휴가를 내 한국에 온 부부, 독일 사람 부부, 스위스 사람 부부와 두 딸, 그리고 또다른 특별한 독일사람 1명, 이철헌 동국대 교수, 박순표 미국 공인회계사, 그리고 우리 부부, 밀양시청 공무원 1명.

이미 알고 있는 사이도 있었지만 이날 처음 보는 사람도 많은,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조합이었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의 목적은 하루를 밀양에서 온전히 즐기자는 것이었다.

여행 경로는 영남루, 무봉사, 호박소, 표충사, 밀양요였다. 표충사 앞에서 점심을 먹기로 돼 있었고.

영남루에 대해 설명하는 이철헌 교수. 영남루에 올라 설명에 열심인 이철헌 교수

영남루에 오르니 이철헌 교수의 해박한 지식이 빛을 발했다. 밀양출신인 그는 전공인 불교철학은 물론 영남루에 얽힌 여러 이야기, 영남루의 건축양식과 특징 등등에 대해 아낌없이 설명해 주셨다. 물론 한국어로 설명했지만 파독 간호사+광부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 9살부터 19년을 독일에 살면서 독일 국민인 김경필 이사가 독일어로 통역을 해주었으니 참가자들이 모두 흡족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독일어 통역을 맡아 여행을 즐겁게 해 준 독일인 김경필 이사

여담이지만, 이날 여행은 많은 사람의 재능기부로 이뤄졌다. 이 교수와 김 이사를 비롯해 박일호 밀양시장은 승합차와 운전할 직원 한 분을 흔쾌히 지원해줬고, 전체 여행 스케줄은 박 회계사가 맡았다. 나야 특별히 기부할 재능이 없었는지라 충실하게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을 맡았다.

무봉사에 봉안된 1400여 년 된 석조여래좌상

영남루 앞에 있는 무봉사(舞鳳寺)에 들러 1400여 년 전의 석조여래좌상을 친견하고 역시나 해박한 이 교수의 불교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호랑이 진돗개 호봉이도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었지만, 방금 한 떡이라며 찰시루떡을 나눠주신 보살님도 정말 고마웠다.

밀양강이 내려다보이는 무봉사 대웅전 앞 벤치에서. 오른쪽 앞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경필 이사, 박순표 회계사, 스위스인, 독일인, 오스트리아인. 밀양강이 내려다보이는 무봉사 대웅전 앞 벤치에서. 왼쪽부터 각각 독일인, 스위스인, 오스트리아인과 결혼한 한국 여성.

밀양시에서 내어준 승합차에 나눠타고 호박소로 옮겼다. 밀양에는 제법 여러 번 와봤고, 바로 코앞의 얼음골 케이블카도 타봤지만, 호박소는 처음 가봤다. 이 교수님과 박 회계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처음 가본 곳이었다. 심지어 밀양 무안면이 처가라는 김 이사도 호박소는 처음이라고 했다. 

호박소 앞에서 호박소 앞에서 호박소 앞에서 포즈를 취한 아내. 호박소 앞에서 포즈를 취한 박순표 회계사와 김경필 이사. 호박소 전경

호박소 구경을 마치고 표충사로 넘어오는 길. 새로 생긴 길이라는 데 무척 가파른 고갯길이었다. 고갯길 양쪽으로는 컨테이너 박스 하나씩 가져다 두고 산밭을 일군 곳이 곳곳에 있었다. 건축허가가 안 나는 지역에 집을 지으려는 장기적인 포석으로 보였다.

구천요에서 기념촬영. 왼쪽 둘째가 구진인 선생. 익살스러움이 묻어나는 토우 화분. 구진인 선생 작품.

점심을 낮 12시에 예약해뒀는데 시간이 30분쯤 남았다. 그래서 길 도중에 있는 밀양시 단장면 구천요에 잠시 들렀다. 장작가마를 고집하는 구진인 선생은 산청 출신인데 부산에서 작품활동 하다가 밀양으로 들어왔단다. 밀양에는 구 선생 같은 도예인들이 30여 명이 골골이 앉아 있다니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밀양을 도예의 고장이라 불러도 좋지 싶었다. 구 선생은 한창 가마에 넣을 도자기 마지막 손질 중이었는데도 예고 없이 불쑥 찾아간 우리를 반기며 우엉차를 내놓았다. 점심 후 표충사 주지 도훈 스님과 다담(茶談)이 약속돼 있다는 말을 듣고는 우리를 배려해 준 것일 터이다.

도훈 표충사 주지스님과 다담을 나누는 여행자들. 덕담을 주시는 도훈 표충사 주지스님 주지스님 처소인 삼청각 앞에서 기념촬영.

표충사 앞 식당에서 더덕 양념구이와 각종 산채, 도토리묵, 쌈으로 밥을 먹은 뒤 표충사로 들어가 도훈 스님을 뵈었다. 평소에는 굳게 닫힌 삼청각(주지 스님 처소) 대문을 열고 파란 눈의 외국인 일행을 반갑게 맞아 주셨다. 아마도 내어주시는 차는 우전인 듯 다향이 깊고 맛이 폭넓었다. 참가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첫 잔은 약간 쓴맛이었는데 나중에는 감칠맛까지 마실 때마다 맛이 달라지는 것이 인상 깊었다고 격찬했다. 불교에 대해 이방인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하려 애쓰시는 모습이었다.

스님을 뵙고 표충사를 둘러보는데 건물 외벽에 그려진 십우도(十牛圖 또는 심우도尋牛圖·수행 과정을 소를 찾아 길들이는 것에 비유해 그린 그림)에 대한 이 교수 설명을 들은 독일인 아내가 “그러면 말 안 듣는 남편도 저렇게 매어 두면 말을 잘 듣고 일심동체가 되겠군요”(牧牛 장면)라는 바람에 폭소가 터졌다.

밀양요 장작 가마 앞에서 기념촬영. 밀양요에서 다담을 나누는 여행자들. 왼쪽 처음 얼굴 보이는 이가 김창욱 선생 부인. 밀양요에서 다담을 나누는 여행자들. 오른쪽 위가 김창욱 선생.

표충사 관람을 마치고는 이날 일정 마지막 목적지인 부북면 밀양요로 갔다. 밀양요 김창욱 선생은 지난해 여름 스페인에서 개인전을 열 정도로 예술도자기(陶刻)에 조예가 깊은 분인데 전통 장작가마를 고집하고 있다. 근래에는 예술도자기 뿐만 아니라 각종 다구(茶具)도 제작하고 있는데 경성대 공예디자인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부인과 함께 일행을 반갑게 맞으며 황차를 내 놓았다. 단지 공간이 좁아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다른 방에서 차와 도자기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다지 바쁘지도 않게, 그다지 느긋하지도 않게 하루를 보내고 밀양시청에 다시 모이니 오후 5시 30분쯤 됐다. 8시간 넘게 함께 여행하면서 보니 참가한 외국인의 관심사도 조금씩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딸과 자상스레 어울리는 스위스인

독일인은 “밀양에는 여러번 왔는데 오늘 돌아본 곳은 대부분 처음이었다”며 “한 달에 한 번씩은 밀양에 와야겠다”고 말했다. 알프스산자락에서 나고 자란 그의 주된 관심사는 밀양을 둘러싸고 있는 밀양알프스 등 산악이었다. 스위스에서 온 사람은 두 아이에게 무척이나 자상했다. 가는 곳마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함께 어울려주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가슴에 새겨진 ‘자연의 친구들’ 글귀가 잘 나오게 사진을 찍어달라는 오스트리아인.

오스트리아에서 온 사람은 호박소에 갔을 때 안에 받쳐 입은 흰색 티셔츠에 새겨진 글귀를 가리키며 그 글귀가 잘 나오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김 이사 통역을 들어보니 ‘자연의 친구’ 비슷한 뜻의 글귀라는데 자연을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자랑하고싶다고 사진을 잘 찍어 달라는 것이었다. 깨끗한 자연환경에 경탄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제각각인 개성임에도 도훈 스님과 만났을 때나 도자기에 대한 관심, 차에 대한 관심에서는 다들 일치했다.

그렇게 하루가 갔다. 기꺼이 시간을 내서 재능기부를 해주신(심지어 점심 밥값도 더치페이로 해결했다) 이 교수님, 김 이사님, 박 회계사님, 박일호 밀양시장님과 운전해주신 시청 공무원, 그리고 함께 어울려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디지로그

축구가 좋은 축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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