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해킹 의혹, 문제는 따로 있다
국가정보원(국정원 NIS)이 이탈리아의 해커그룹에게 해킹 프로그램을 구입한 것을 두고 정치권이 들썩이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인권과 안보가 충돌했다고 하고 다른쪽에서는 정치와 안보가 충돌했다고도 합니다. 만에 하나라도 국정원이 이 해킹 프로그램을 이용해 국민의 사생활을 들여다보고 사찰하거나 감시했다면 정말 큰 문제입니다. 정치권에서 난리를 치고 있지만, 국정원이 국민을 사찰하고 감시했다는 주장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중앙정보부(중정)-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국가정보원(국정원)으로 이름이 바뀔 수밖에 없었던 과거 군사독재-권위주의 정권하에서 단죄받았던 것보다 훨씬 가혹한 처벌을 받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 전제 아래 이번 국정원 해킹 의혹-논란에 대해 좀 색다른 내 생각을 얘기해보렵니다.
중정에서 국정원으로 오기까지 국정원의 사시(?) 표어(?)는 몇차례 바뀌었습니다. 김종필 전 총리가 중정을 창설하면서 제시한 표어는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정보는 국력이다’로 바뀌었고 이명박 정권에서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중 내 개인 생각으로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가 국가 정보기관의 표어로 가장 적절했지 싶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번 국정원 해킹 프로그램 구입과 그에 따른 해킹 의혹.논란은 국가 정보기관의 기본을 망각한 일이라고 봅니다.
정보기관의 일상적인 정보활동이든, 공작이든 가장 기본은 비밀이라고 봅니다. 그 비밀이 노출된다면 그런 활동을 안하느니만도 못한 몹시 나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정부나 법률로 국정원의 활동과 조직, 예산 등에서 많은 부분을 공개하지 않아도 되도록 보장하고 있습니다. 국정원 목적을 달성하려는 모든 활동 역시 비공개될 수 있으면 더 좋다고 봅니다. 해킹 프로그램을 구입하든 민간인을 사찰하든, 대북 공작을 벌이든, 기업 비밀을 지키려는 활동을 하든 국정원은 모든 활동을 들키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번 해킹 프로그램 구입 사실이 들통났습니다. 아 그렇다고 국정원이 민간인을 사찰하고 불법적인 활동으로 국민을 사찰하고 감시하는 게 정당하는 얘기는 ‘절대(!)’ 아닙니다.
내가 하는 얘기는 국가 정보기관이 칠칠맞게 꼬리나 밟히고 다닌다는 점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고보면 국정원(또는 그 전신까지 포함해서) 이런 칠칠맞은 짓을 한게 한두번이 아닙니다. 지난 대선에서 여론조작 의혹을 산 것도 그렇고, 각종 간첩단 조작 사건이나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에 무단 침입해 정보를 빼내려 한 일 등등 어디 한둘이어야 이해하고 용서하기라도 하죠.
민간인 불법사찰 내용이 녹음된 테이프민간기업에서 프로젝트를 추진하더라도 플랜A는 물론, 그게 안됐을 경우를 상정해 플랜B, 플랜C를 마련하는 것은 예사입니다. 한데 비밀을 최고 덕목으로 삼아야 할 국가 정보기관이 플랜B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행적의 꼬리를 밟혔다는 것이 국정원 비판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위키리스크를 통해 미국 CIA도 털리고, 내부고발자는 언제 어디서건 나올 수 있다는 경각심이 전 지구적으로 퍼져나간 게 불과 몇년 전입니다. 그런데도 국정원은 태연하게도, 적국 정보기관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조금만 관심 있으면 알만한 군부대 이름으로 해킹 프로그램을 샀고, 관련 내용을 이메일로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언젠가는 그 이탈리아 해킹팀도 털릴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갖고 플랜B 등을 마련했어야 했는데도 아무것도 안했습니다. 국정원 여직원은 대선 여론조작 의심을 충분히 살만한 상황에서 야당에게 들통 나 붙잡혀 감금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국정원은 35개국 97개 기관이 해당 프로그램을 구입했다고 주장하면서 그 어떤 나라에서도 국가 정보기관을 정치적으로 몰아부치지 않는다고 항변합니다. 하지만 궁색한 변명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남들이야, 다른나라야 어떻든, 국민의 신뢰를 받는 정보기관이 되려면, 설령 해킹프로그램을 구입했더라도 들키지 말아야 했습니다. 국정원으로 어느 누구도 추정할 수 없는 대리인이나 중개업자를 내세우거나 아니면 나중에 문제가 됐을 경우 깨끗이 ‘청소’ 할 수 있는 퇴로를 마련해뒀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국정원은 거기서 실패했습니다. 작전에 실패한 장수는 용서해도 경계에 실패한 장수는 용서할 수 없다는 군사 금언이 있습니다. 이 경우 국정원은 작전에도 실패했지만 경계마저 실패했습니다. 장수만 처벌할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조직 존폐를 거론해야 할 사안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국가 정보기관이 하는 일이 모두 ‘합법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정치적 마타도어일 수도 있습니다. 정보기관의 활동을 평가할 때는 그게 합법이냐 불법이냐를 따질 게 아니라 누군가가 알 수 있느냐 쥐도 새도 모르느냐가 돼야 합니다. 개나 소나 알지는 못하더라도 누군가가 알 수 있는 꼬투리를 남긴다면, 그게 의도적인 작전이나 공작이 아니었다면 정보기관으로서는 젬병이라는 겁니다.
여직원이 대선 여론조작에 관여했다고 할지라도 그건 정말 아무도 몰랐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꼬리를 밟혔습니다. 이런 어설픈 공작을 하는게 대한민국 대표 정보기관 국정원의 능력.실력이라면 이런 조직을 과연 그대로 놔둬야 하는지 근본적인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인도네시아 특사 호텔방에 침입했다가 붙잡히는 정보요원이라면 그야말로 쥐도 새도 모르게 상대국 정보기관에 의해 깨끗이 암살당할 수도 있고, 납치돼 역공작의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이런 국정원이라면 없는 게 국익에 더 이익일 겁니다.
나는 강력한 대한민국 정보기관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은 물론이고 중국이나 일본 정보기관과도 우위에 서서 정보전을 펼칠 강력한 정보기관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우방이라고 하는 미국 CIA를 상대해서도 공작을 펼치고 역정보를 흘리기도 하고 모샤드나 이슬람권 정보기관과도 치열한 정보전을 펼칠 수 있는 그런 정보기관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국제 정치, 총성 없는 경제 전쟁에서 합법적인 활동만으로 국가 이익을 지켜낼 수는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보기관의 역할이 정치적 군사적인 데서 경제문제로까지 확대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때로는 공작을 벌여서라도 선진국 기술을 빼오는데 힘을 보태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 기술을 빼가려는 다른 나라 정보기관.기업의 공작을 막아내기도 해야하는 게 국가 정보기관입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정치권은 여야로 나뉘어 본질은 모르쇠로 일관합니다. 민간인 사찰을 했는지는 정말 국회 통제를 받는 국정원이라면 시간이 문제이지 밝혀질 일입니다. 여당은 정권 유지를 위해 국정원을 악용한 게 아니라면 당당하게 ‘국정원 너 왜그래’ 하면서 다그쳐야 합니다. 야당은 안철수를 내세워 국민 불안을 조장할 게 아니라 국회 통제권을 활용해 사실을 밝혀내되 정부여당이 국가 정보기관을 악용하지 못하게끔 힘을 써야 합니다. 국민적 공포심 조장은 대한민국 어느 누구에게도 해만 됐지 득은 될 수 없습니다.
맨날 하는 뻔한 얘기지만 국정원도 정말 환골탈태해야합니다. 그게 안된다면 국정원을 해체하고, 국정원 핵심 요원을 배제한 새로운 국가 정보기관을 창설해야 합니다. 국내 정치에 개입하는 재미에 푹 젖어 있는 암같은 요원들을 깨끗이 도려내고 새 부대에 새 술을 담아야 할 때가 왔다고 봅니다.
국정원 직원도 대한민국 국민이고 사람입니다. 국내 정치에 관심 정도도 제가끔이고, 생각도 제가끔일 터입니다. 그런 정치적 성향이 국가 정보기관이라는 본연의 구실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정치는 정보기관을 안보를 놔줘야 합니다. 그에 앞서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휘둘리지 않으려는 정보기관의 대오각성과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한가지 사족으로 덧붙이자면, 이번 국정원 해킹 논란으로 애플과 힘겨운 전쟁을 벌이고 있는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유탄을 맞게 됐다는 점이다. 애플 아이폰은 RCS(또는 그밖의 온갖 해킹 프로그램)로도 뚫기 어려운 철옹성이라는 게 드러났지만, 안드로이드 기반의 삼성이나 엘지 스마트폰은 속수무책이라는 게 드러났습니다. 김대중 정부 이후로 경제 정보활동으로 무게중심을 옮겨가고 있는 국정원이 대한민국 경제 권력을 말아먹게 생겼다는 점도(물론 1차적 책임은 국정원이 아니라 안드로이드에 몰빵하는 기업 책임이기는 하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대한민국이 대오각성해야 할 점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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