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시인 김기수 씨 부부가 사는 법

일이 있어 오르는 산은
뒷동산마저도 노동이다
계절은 어김없이
높은 산에다 일거리를 만들어 놓았다
바람이 불어도 눈보라가 휘몰아쳐
눈, 코, 귀 모두 꽁꽁 얼쿠워도
높은 산 일은
기다려 주지를 않기에
귀 막고 코 막고
뻬꼼히 눈만을 내놓은 채 노동을 한다
배낭 속의 주먹밥이 얼음덩이가 되었어도
시장기는
꾸역꾸역 목구멍을 넘는다
오전에 늘어놓은 줄이
땡땡이 얼어 일상을 거부하는 고집이다
시린 손 호호 불며
우찌 우찌 하루해는
서산에 누우려니
더 이상은
겨울바람과의 대적은 무리수다
따뜻한 아랫목을 향해
추위 탈출을 시도해 본다
-김기수 세 번째 시집 <지리산의 향기>에서 ‘한 겨울의 노동’.

참 우연이었다. 10월 4일 오후 밥집을 찾지 못해 라면 한 그릇 끓여 달라고 들어간 동네 슈퍼였는데, 얘기하다 보니 원래 목적에 못지않은 ‘왕건이’를 건진 셈이다.

화개면 의신 마을 버스 종점에 있는 슈퍼 주인 김기수(53) 씨와 추일주(47) 씨 부부를 그렇게 만났다. 산골 마을에 사는 어려움을 얘기하며 제발 취재해서 보도 좀 해달라고 많은 얘기를 해주는데 라면 먹으면서 받아 적을 수도 없고 해서 연락처를 하나 달라고 했더니 불쑥 시집 한 권을 건네주면서 “거기 다 들어 있어요” 한다. 지리산 골골이 들어앉아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야 어디 한둘이던가.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챙겨 원래 목적이었던 문찬인 지리산자연치유학교 교장을 만나러 가서 볼일을 보는 도중 짬짬이 방금 받은 시집을 넘겨봤는데, 이게 장난 아니었다. 산사람의 보람과 고충, 화목한 가족사에 이르기까지 녹여내는 글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표지 날개에는 작은 그림이 있는데 이건 그의 아내가 그렸다고 해놨다.

무슨 사연인가 싶어 저자 약력을 봤더니 충북 증평에서 나서 경기 부천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했던 사람이다. 구미가 확 당긴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오후 3시쯤 됐다. 슈퍼로 다시 가 다짜고짜 “인터뷰 좀 합시다” 했다. 사람 좋게 허허 웃으며 “나같은 사람 뭐 인터뷰할 것 있어요. 이 동네 버스 문제나 제대로 취재해서 보도해주면 좋지” 한다.

카메라를 주섬주섬 꺼내서 잇따라 셔터를 눌러대는데 저쪽 옆에서 설거지하고 있던 아내 추일주 씨가 “아이 참, 수염 좀 깎고 사진을 찍지 그래”하며 툴툴거린다. 김기수 씨도 밀리지 않고 대거리다. “아니 이사람아, 수염 사진 찍는 데 수염 깎아버리면 무슨 사진을 찍으라는 겨.”

그러고 보니 김 씨 목소리도 어지간한 고성(高聲)인데 추 씨 목소리는 보통 보다는 한 옥타브 높다. 굉장히 활달하다. 라면 끓여 주면서도 잠시도 입이 가만있지 않고 “김치 더 드려요? 공깃밥 드릴까?” 하며 이것저것 세심히 신경 써주더니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한동안 직접 인터뷰에는 응하지 않고 남편 인터뷰하는 데서 고음으로 남편을 이끌어주기도 하고, 기자가 맥을 놓쳤다 싶으면 바로잡아주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부부 사진을 같이 좀 찍자 하니 그건 한사코 안 한단다. “내가 사진빨을 너무 잘 받거든요. 함께 찍으면 신랑이 꾀죄죄해져서 안 돼요.” 함께 사진을 안 찍는 이유라는데 참 뭣하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인터뷰를 진행했다.

처음 본 사람들이 한동네 사람 같아

약력을 보니 증평 출신이고, 부천서 생활했고, 초등학교 교사도 했고, 문협 회원이기도 하던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라고 물었더니 “그냥 여행 왔다가 눌러앉았어요. 이웃집에 우리 2박 3일 여행 갔다 올 테니 집 좀 잘 봐달라고 말하고 떠나왔는데 그 이후로 아내는 그 집에 지금까지 못 가봤어요. 내가 가서 짐 챙겨 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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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헐~’이다. 아니 여행 갔다가 그냥 주저앉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직장생활 하면서 또 형편 되면 귀농이나 귀촌할 거라는 바탕은 깔고 있었어요. 도시생활이 내 취향에 안 맞으니. 게다가 집사람이나 나나 여행을 좋아해서 신혼 초부터 해서 전국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예요. 시골 생활도 좋아했고요. 그렇게 이곳 화개골로 여행을 왔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그게 마지막 여행이 됐어요.

뭐가 그리 좋았을까?

여기 오니 너무 좋았어요. 경치나 그런 것도 그렇지만 처음 만났던 사람들이 너무 잘해주고 오래 만난 지인처럼 같이 자란 한동네 사람처럼 발 벗고 나서 도와주고 그러는 게 너무 좋아서 눌러앉았고, 힘들지 않게 정착했어요.

하지만 추 씨 얘기는 조금 다르다.

결혼하기 전부터 산골에 들어가 사는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어디 소설이나 영화 같은 데 나오는 것처럼 정말 첩첩산중에 토굴 파고 사는 그런 상상을 하곤 했죠. 그럴 거라면 한번 살아볼 만하겠다, 그런 환상 같은 게 있었다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와서 살아보니 그게 아닌 거예요. 속았죠 뭐. 하하.

그래서 지금도 지리산 더 깊이 들어가 토굴 파고 생활하는 꿈을 꾸곤 한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뭐라 하겠지만 계속 사는 게 아니라 한 달쯤 살다가 내려오고 그러면 봐주지 않겠느냐는 기대를 하면서.

우리 딸래미들은 도회지 가서 사는 게 꿈이래요. 그래 그러죠. ‘그래 니들은 어서 커서 도시 가서 살아라. 그럼 엄마 아빠는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토굴 파고 살 테니’ 그러죠.

트럭에 생필품 싣고 골짝을 누비다

435667_333470_5511그렇게 마치 고향 집에 찾아온 듯 눌러앉아 산 지 13년. 그동안 어디 쉽게 정착했을까? 후회는 없었을까? 다시 도시로,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안 들었을까?

추 씨야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토굴 파서 살고 싶다니 말고, 김 씨에게 물어봐도 아니란다.

>결단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후회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어요. 사는 동안 내가 정착하기 위해 옆에 사람이 뭐라 하기 전에 내가 열심히, 자타가 공인할 만큼 열심히 살았어요.

의신 마을에 눌러앉은 첫해에는 특용작물을 해보겠다고 노는 땅을 빌려 수박과 참외를 시작했다. 새벽 4시에 나서면 깜깜해질 때까지 밭에서 일했다. 그렇게 1년을 보냈다.

여기 습성을 모르니 그 농사는 망쳤죠. 정말 10원 한 장 못 건지는 생활을 1년 한 겁니다.

그런 식으로는 안된다는 자각을 했다. 사람 사귀는 걸 좋아하니 일단은 먼저 이 골짜기 습성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시작한 게 행상이었다고. 채소와 과일, 생선, 일반 생활용품 등 70여 종을 1톤 트럭에 ‘빵빵하게’ 싣고 화개면 골짜기 골짜기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했다.

처음 6개월간은 쑥스러워 말도 못 꺼냈어요.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니 좀 뻔뻔해지고 단골도 하나 둘 생기고 그러더라고요. 그렇게 3년을 장사했습니다.

그렇게 장사하는 동안에는 어느 집에는 냉장고가 어디에 있고, 어느 집에는 몇 식구가 사는데 나가서 먹는 사람이 몇 명이고 들어와서 먹는 사람이 몇 명이라는 걸 알 정도가 됐다. 습성을 알 만큼 친해졌다는 것.

3년을 하다 보니 골 안에 사람들 얼굴을 다 익히게 되더라고요. 나도 내 어머니 내 할머니처럼 동네 어르신들을 대했고요. 그렇게 친해지고 나니 이제는 내가 취급하지 않는 물품도 구해달라는 부탁을 하곤 하더라고요. 그렇게 심부름꾼 역할도 톡톡히 하곤 했습니다.

지금도 한 번씩 다른 골짜기 사는 어르신들 만나면 아직도 아쉽다며 다시 행상 안 할거냐고 묻곤 한다고. 그럴 정도로 몸으로 부대끼다 보니 더더욱 김 씨 내외가 정착할 수 있도록 마음써주는 사람도 늘어났다고 한다.

마침 행상하던 얘기를 하는데 순천에서 왔다는 생선 행상이 들어와서 갈치나 전어 좀 사라고 한다. 그 행상은 운이 없는 건지 게을러 그런 건지, 하여튼 오전에 생선 행상이 한 바퀴 돌고 간 뒤라 개시도 못 한 듯 좀 팔아달라고 매달린다. 이미 더 살 것이 없는 김 씨는 되레 슈퍼에서 파는 아이스크림 두 개를 그 행상에게 팔았다.그렇게 보내놓고 한마디 한다. “저런 생활을 3년 한 겁니다.”

김 씨는 옛일을 회상하는 듯 담배를 빼어 물고 깊게 들이마셨던 연기를 후~ 내뿜는다.

산에 올라 욕심 없이 약초 채취하고 행상 3년을 접고 그는 본격적으로 약초에 매달렸다.

약초와 버섯에 전념해서 그때부터 꾸준히 약초도 캐고 산으로 들로만 다니고 있어요.

슈퍼 한쪽 벽면은 온갖 산약초로 담근 술과 효소가 얹힌 선반이다. 뒤에 창고에 가면 더 많단다. 한 100여 종 된다고.

저는 학술적인 것은 잘 몰라요. 성분이 어떻고 어떤 성분이 어떤 증상에 좋고 그런 건 모른다는 거죠. 다만 체험으로 얘기하죠. 옛 어르신들이 얘기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가 설명하기도 하고요.

약초 공부도 쉽지는 않았다고. 때때로 독초를 먹고 죽을둥 살둥 떼굴떼굴 굴러서 집에까지 오거나 독버섯을 잘못 알고 먹어 생고생을 한 일도 부지기수라고 했다.

귀촌 후 세 번째 직업인 약초 채취. 앞서 든 시처럼 어디 힘들고 어려운 일이 한둘일까.

어떻게 보면 내가 하는 일은 산일이고, 산에 순응하면 충분히 마음이 열린다고 봐요. 내가 몸이 지쳤을 때도 산에 올라 나무숲 지나고 땀 흘리고 위에 올라가다 보면 어딘지 모르게 내가 가벼워져요. 옛사람 중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지요.

내 것을 버릴 줄 모르고, 누군가를 증오해 잊고 싶은데도 잊히지 않는다면 산을 오르라고. 산을 오르기 전 입구에서는 누구 죽일놈 나쁜놈 웬수 하면서 원망하면서 간다고. 오를수록 힘이 드니 하나씩 버리고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10가지 생각 갖고 왔지만 꼭대기에 올라갔을 때는 다 버리고 성취감밖에 안 남는다. 아이구, 내가 여기까지 올라왔네. 죽을 고생 했네. 이것 하나만 남는다는 말. 그가 산에 오르는 것은 버리는 연속이라는 말을 하는 까닭은 자신이 겪어본 일이기에 그렇단다.

그러니까 저 사람이나 나나 산에 들어가면 좋아요. 저 사람도 가끔 가슴이 답답하거나 하면 손님이 있건 없건 문 걸어 잠그고 산에 올라가요.

산에 가면 뭔가를 준다는 것도 산에 가는 이유라고 했다. 봄에는 나물, 여름에는 버섯, 가을에는 열매를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뭐 욕심내서 많이 가져오려고도 안 해요. 내가 취한 만큼만,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가져오는 거죠. 그러다 보면 답답했던 게 싹 가시고 ‘내가 여기 왜 왔던가’는 생각만 남는 거죠.

틈틈이 방과후 수업 놀이·미술 지도

이제 그는 여유를 얻으려고 한다. 사회에 봉사할 부분이 있는가 하다 보니 마침 한국전래놀이지도자 자격증이 있는지라 재능기부 차원에서 아랫마을 왕성분교에서 방과후 수업을 맡고 있다. 이날 인터뷰를 하다가 3시 40분쯤 되자 4시부터 수업이라며 보따리 챙겨들고 나갔다.

이제 본격적으로 추 씨와 대화를 할 차례.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뭔가 손에 일거리를 쥐고 있었으니 이제는 그 일거리 앞으로 다가가 대화를 시도한다. 마침 햇볕 따뜻한 곳에서 밤을 고르고 있다.

“밤이 참 실하고 좋네요”라고 운을 떼니 줄줄 나온다.

이건 내가 주워 온 것이고, 저 안에 있는 구지뽕 열매(오디)는 신랑이 따온 거예요. 이 아줌마가 지난번 표고버섯을 시키기에 맛이나 보라고 밤을 조금 넣어 보냈더니 이번에는 밤을 주문하네? 내가 맨날 받을 수가 있나요? 주니 받고, 받으니 주는 거고……. 눈에 보이는 대로 집어주는 거죠. 내 손으로 하는 거니. 그러면 사람들이 친정 왔다 가는 듯해 좋대. 좋다니 나도 좋아 한 개라도 더 싸주고 싶고 그래요.

그렇지만 스스로 ‘참 못됐다’고 말했다. 사람이 들어설 때부터 ‘아니다’ 싶은 사람이 있다고. 그런 사람에게는 턱도 없는 소리라며 “나 못됐으니 건들지 마요” 한다.

그는 화가와 교사를 두고 고민하다가 화가가 됐다고 했다.

내가 얼마나 못됐냐면 교대 안가고 미대 간 게 참 잘했다 싶다니까요. 내가 교대 가서 교사 됐으면 아마 방송에도 몇 번은 나왔을 걸요?

그러면서 10원짜리에 육두문자가 난무한다. 화가이다 보니 역시 재능기부 차원에서 초등학교 방과후 교실에서 미술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도시는 엄마가 욕심이 많고 아이들도 그렇죠. 애들이 어느 수준이길 원하잖아요. 하지만 여기는 안 그래요. 정부에서 수업료를 지원해주니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욕심이 없어요. 숙제 내줘도 안 해오고 막 떠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하루는 아예 작정하고 갔단다.

막 떠드는 거예요. 바로 시작했죠. ‘야 이 개xx들 나는 시간이 남아서 니네들하고 놀러 온줄 아냐. 나는 일주일에 두 번이지만 일주일을 니네들을 위해 다 소비하는데 아xx들이 사람 신경 쓰이게 하네. 어떤 xx야!’ 한 거죠. 도시에서 같으면 벌써 사진 찍고 녹음하고 난리 났겠죠? 나 참 성질 나가지고. 그러니 선생님 했으면 어쩔 뻔했어요?

그렇게 성질 부리고 나니 뜨끔하긴 했단다. 하지만 아이들이 착해 자기들이 잘못한 일이다 싶으니 조용해지더란다.

그렇게 밤을 택배 상자에 포장하고 있는데 동네 사람들이 택배 보낼 것을 죄다 이 집으로 가져온다. 택배 신청용지 있느냐는 사람, 상자 포장하려는데 테이프가 없다며 빌려주라는 사람까지.

슬슬 인터뷰를 마무리할 때가 돼간다 싶은데 팔순은 넘어 보이는 할머니 두 분이 들어온다. “술 받아먹으러 왔지” 하면서.

택배 부치러 와 있던 청년(그래봐야 40~50대로 보이지만)이 “할매 내가 술받아 주까? 머? 맥주? 막걸리?” 한다. 할머니 한 분이 “내는 그 단술 깡통 살라고 왔는데 맥주 받아주모 좋지” 한다. 맥주 2병이 나오고 안주로는 김치가 나온다. 나에게도 술을 권하는 인심. 운전 때문에 사양하긴 했지만, 그렇게 한잔 얻어 마시고 또 몇 병 사드리고, 그러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다.

그렇게 산골 의신 마을의 하루, 김기수·추일주 부부의 하루도 저물어 갔다.

※ 이 글은 ㈜경남도민일보사가 발행하는 인물 인터뷰 월간지 <피플파워> 2013년 11월호에 게재됐습니다. 기록차원에서 블로그에도 남깁니다.

디지로그

경남도민일보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2017년부터 체육부에 와서 경남FC, 내셔널리그 등 축구를 담당하고, 겨울시즌에는 창원LG세이커스 농구도 담당합니다. 물론 전국체전이나 각종 아마추어나 학교스포츠도 맡아 합니다. 원래는 뉴미디어, IT 등에 관심이 많고, 그에 따른 글을 많이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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