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문 “유기농은 없다 자연에 내맡겨 둘 뿐”
‘8월호 이기열전 인터뷰를 누구로 할까’ 뭐 그런 고민에서 시작한 건 아니었다. 최근 읽은 책들이 식물에 관한 이야기나 자연생태, 농업이 되레 자연을 망치고 있다는 등의 주장을 담은 것들이다 보니 자연스레 자연에서 뺏어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맡겨두는 농업을 실천하는 이영문(60) 씨에게로 관심이 옮아간 것이었다. 더구나 2000년 12월에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기에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해 연락을 해봤다. 다행히 전화번호가 바뀌지 않았고 인터뷰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장맛비가 오락가락했지만, 7월 5일 사천시 곤명면사무소 앞에 있는 ‘태평농 연구소’로 그를 찾아갔다. 그가 40대 후반일 때 만나고 60줄에 들어서 다시 만났는데도 별로 달라지지 않은 건강한 모습으로 맞아준다.
우선 근황부터 물어본다.
“그 사이 달라진 것이라곤 사천 비토섬 근처 작은 섬에 지구 온난화 대비 작물 연구를 위해 농장을 차렸다는 것하고, 이곳에 연구소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하동군 옥종면에 있는 들판에서였는데 사천시로 터전 자체를 옮겨왔단다.
개암, 번롱화를 아세요?
온난화 대응식물이라니, 구미가 당긴다. 먼저 지금까지 이룬 성과가 뭐냐고 대뜸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개암을 아세요?”였다. 개암이라니, 작은 감을 말하는 고욤 말인가?
“개암을 복원해 작년부터 사회에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일제 때 거의 없어지고 자잘한 품종만 남아있는데 이것을 찾아낸 것이죠. 흔히 한국 농작물은 국제 경쟁력이 없다고 얘기하는데, 개암을 영어로 하면 헤이즐넛입니다. 식용 견과류 중 가장 비싼 것이죠.”
경남의 소득작물로 빨리 전환하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 밖에도 기상천외한 얘기가 술술 흘러나온다.
‘번롱화’를 아느냐부터 시작해서 ‘씨살구’, ‘소귀’, ‘호두’, ‘불송과’ 이런 여러 이름이 주욱 나온다.
“‘번롱화’라니, 그게 뭐예요?” 당연히 궁금할밖에. 돌아온 대답은 간략하다. “수입 화훼에 ‘샤프란’이라고 있습니다. 그게 번롱화예요.” ‘아, 꽃인가 보구나’ 싶었는데 그게 다가 아니다. 붓꽃과인 이 꽃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그보다는 꽃 수술을 말린 향신료로 더 유명하단다.
“안 믿겠지만, 번롱화 수술 말린 것은 금싸라기보다 더 비쌉니다.”
그게 경남에 자생한단다. 씨살구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어릴 적 살구나무 있는 친구들이 무척 부러웠던 기자는 살구 얘기가 나오자 군침이 돈다. 하지만 이 씨는 전혀 다른 얘기를 한다.
“요즘에야 워낙 과일도 다양하고 맛도 좋아 살구를 과일이라고 먹는 사람은 드물 거예요. 어쩌다 한번 먹는 별미 정도밖에 안 되죠. 하지만 살구씨 핵을 쪼개면 나오는 알맹이가 뭔지 아세요?”
글쎄, 그걸 쪼개서 알맹이를 먹었던 기억은 있는데 이름이 따로 있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다. “그게 바로 아몬드입니다. 현재는 전량 수입하고 있죠. 하지만 살구를 산에 심어두면 거기서 나오는 게 전부 아몬드입니다. 수입대체뿐만 아니라 지구 온난화가 와도 견딜 수 있는 작목이어서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토종’ 식물에 관한 얘기가 끝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기자가 기억하기에는 개량되지 않은 ‘토종’ 과일은 대부분 맛이 덜하거나 크기가 작아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것. 그렇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토종’에 대한 그만의 철학을 내세운다.
“‘토종’이라고 하면 예부터 있었던 것을 말합니다. 일부에서는 일제시대 때 좋은 토종 작물은 다 없어져 남아있는 것이 없다고도 합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문헌에 남아있지 않거나 지금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토종이 아니라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소귀’라는 과일이 있습니다. 이것도 내가 찾아낸 토종 작물인데, 정부나 농업단체 등에서 기록에 없다고 토종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한데 제주도에서는 지구 온난화에 대비해 감귤 대체 작목으로 선정하고 집중 육성하고 있습니다.”
잘 찾아보면 지금껏 모르고 있었던 토종 작물로도 충분히 국제 경쟁력이 있는 작물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 씨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뉴질랜드 북섬에 자생하는 헤이조아라는 유실수가 있습니다. 굴밤 종류인데 알이 굉장히 굵어 제법 먹을 게 있습니다. 이걸 토착화시켜봤는데 잘 정착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이런 것들을 ‘토종’과는 달리 ‘토착종’이라고 부릅니다. 한반도 기후조건이 변하고 있으므로 바뀌는 기후에 적응해서 자생할 수 있는 품종이라면 ‘토착종’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그가 경남도 농정만 보자면 울화통이 치민단다. 예전 태평농업을 시작할 때도 그랬지만 이번 온난화 대체 작목 개발에도 나 몰라라 할 뿐만 아니라 애써 찾아내도 인정하지 않고 폄훼하려 한다는 것. 인터뷰 당일은 비가 와서 섬에 들어가보지 못했지만, 다음에 날씨 좋을 때 꼭 섬에 꾸며놓은 농장을 취재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모든 자료를 공개할 터이니 농민들이 살아갈 길을 널리 알려달라는 부탁과 함께.
경전선 교각 간격이 다른 이유는?
태평농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물었는데 중학교 시절 얘기로 거슬러 올라가게 됐다.
“어릴 때 부모님께선 참 가난하셨어요. 제법 머리는 있었는지 당시 중학교에 입학은 했는데 월사금을 제대로 못 내다보니 1학년 중퇴를 했지요. 그리곤 공부를 계속해 볼 요량으로 무작정 서울로 갔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서울에 가면 뭔가 뾰족한 수가 생기지 않을까 기대하고 갔지만,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고. 심부름부터 자장면 배달까지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중학교에 갈 방법을 찾아봤지만 한 입 풀칠하기 급급했단다. 그렇게 1년 반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고. 당시 살던 집은 현재 연구소 인근이었다고 한다. 어떻게 해서 다시 중학교에 들어갔지만, 여전히 월사금을 제때 낸 적이 없었다고 했다.
“집에서는 학교 간다 하고 나왔지만, 학교에 가지 않은 날이 많았어요. 당시는 월사금 안 내면 수업 안 시키고 교무실 앞에 꿇어 앉혀 놓곤 했을 때니까요. 그게 너무 싫었지요.”
마침 경전선 철로 가설공사가 한창이었다. 공사 구경하는 것이 학교 수업보다 더 재미있기도 했다고.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홀연히 기회가 찾아온다.
“진양호 사천만 배수로 위로 경전선 철로가 지나갑니다. 그 철교에 비밀이 두 개 있는데요, 하나는 교각 간격이 달라요. 일정한 간격으로 가다가 마지막 교각 사이는 훨씬 좁습니다. 또 하나는 교각에 보면 구명이 몇 개 뚫려 있어요. 이거 아는 사람은 몇 안 될 걸요?”
어느 날 콘크리트 반죽을 위로 실어나르는 기계에 고장이 났는데 몇 시간 째 원인을 못 찾아 헤매던 중 이영문 씨가 나서서 손쉽게 고쳤다고 했다. 기계가 잘 작동하자 현장 소장이 당시로서는 꽤 많은 돈을 주더란다. 정확히 액수는 기억 못 하지만 그 돈으로 밀린 월사금을 다 낼 정도였다니 중학생이 만지기 어려운 거금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밀린 월사금을 다 냈으니 다음날부터는 학교로 충실하게 등교했다. 그런데 다음날 그 현장 소장이 학교로 찾아와 교장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께 이 씨를 칭찬하고 돌아가 일약 학교에서 스타가 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게 기계에 대한 능력이 제법 있었나 봐요. 그리고 은인도 만나게 됐죠.”
이후 이 씨는 철교 가설 현장에서 아르바이트하게 됐다. 학교 마치면 현장에 와서 일을 거들라는 것이었다. 글을 읽을 줄 알고 철교 설계를 읽어내는 것을 보고는 노동자들에게 해야 할 일을 알려달라는 것이었는데, 일종의 ‘감독’ 역할이었다고. 여기서 한 가지 비밀이 밝혀진다. 분명히 설계대로 작업을 진행했는데 마지막 교각을 세울 지점에 가서 보니 간격이 확 좁아진 것이다.
“지금 생각인데, 당시 설계대로 한 것은 맞지만 제대로 설계를 배우지 않았다 보니 거푸집 두께를 생각하지 않고 설치를 해간 겁니다. 설계도에서 거푸집 두께만큼 빼고 교각을 설치했어야 했다는 거죠. 하지만 어쩔 수 없었죠. 좁아진 대로 교각을 설치할 수밖에….”
그렇게 무사히 철교는 완공됐는데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내일이면 박정희 대통령까지 참가한 가운데 경전선 개통식이 열리기로 돼 있던 날 밤 몇몇 사람이 집에 있는 이 씨를 찾아와선 현장 사무실로 가자고 했다. 가보니 현장소장보다 훨씬 높은 자리에 있어 보이는 사람이 “정말 네가 감독해서 철교를 세웠느냐”고 물어보면서 설계도를 펴 놓고 이것저것 물으면서 미심쩍어했지만 이내 왜 교각 간격이 좁아졌는지를 물어보더란다. 이 씨가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은 “설계도대로 했을 뿐인데요”였다고.
그날 안 사실인데 그 전날 밤 본사에서 와서 교각 간격이 다른 걸 보곤 폭파하고 다시 건설하기로 했으며 이미 교각에 다이너마이트를 꽂아넣을 구멍까지 몇 개 파내놓고 있었단다. 하지만 내일 대통령이 준공식에 참여하는데 철교가 폭파되고 나면 준공식을 망칠 터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 씨에게 사실 확인을 했던 것. 이 인연으로 이 씨는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개통 버튼을 누르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 뒤 몇 년쯤 지났을 때 아주 예쁜 편지지에 쓴 편지가 한 통 왔더란다. 당시 현장소장이 사망했으며 생전에 가끔 이 씨 얘기를 하곤 했기에 사망 사실을 알려준다는 유족의 편지였다.
“이제 경전선 복선화가 되고 나면 지금 철교는 아마 철거될 겁니다. 내게 남은 큰 추억 하나가 세상에서 지워지겠지요.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하는 건 그렇게 교각 간격이 다르다 보니 교각 밑을 지나가는 도로를 확장하면서 교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상하행선이 지나면 될 것을 교각 두 개를 사이에 두고 지나갈 수밖에 없어 아마 공사비가 훨씬 많이 들어갔을 거다 싶다는 겁니다.”
농기계 쓰면 쓸수록 농사 망치는데…
그렇게 월사금을 제때 낼 수 있게 해줬던 경전선 공사는 끝났고, 결국 2학년을 마치지 못하고 중퇴한다.
“학교를 그만두고 한동안 집에서 농사를 거들고 있었죠. 당시는 정부가 주도한 ‘영농기계화’가 어느 정도 정착돼 경운기는 마을마다 몇 대씩 있었고, 막 트랙터가 보급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한 번도 배운 적은 없지만, 농기계 수리업을 시작했다고. 기계에 밝은 그의 눈이 기회를 잡아낸 것이다. 지금도 그의 연구소 앞에는 1966년식으로 1968년에 생산된 경운기가 놓여 있다.
“농기계 수리업을 하면서 대동공업 제품 개선위원으로도 참가해 한국 실정에 맞도록 경운기를 개조 하는 데도 제법 역할을 했습니다. 또 제법 돈도 모았죠.”
돈을 벌게 되자 평생 땅이라곤 가져보지 못하고 남의 땅에 농사지어온 부모님 생각해서 논부터 사들였다. 그렇게 농기계 수리업을 하면서 직접 농사도 지으면서 온갖 실험을 하기 시작한 게 농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농사짓는 태평농업이 시작된 계기였다. 역설이다.
“농기계 수리업을 하면서 제품 개선위원으로 활동하려다 보니 농사지으면서 온갖 실험을 해볼 수밖에 없었죠. 한데 고민이 깊어지더라고요. 경운기로 트랙터로 논을 갈고 써레질을 하는데, 심지어 트랙터로 9번까지 써레질을 해보기도 했어요. 얼마나 흙이 곱게 분쇄됐는지 손으로 만져보면 마치 밀가루를 만지는 것 같을 정도였죠. 그러면 농사가 잘돼야 잖아요? 하지만 써레질을 많이 한만큼 잡초만 무성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살짝 갈고 한 번만 써레질했을 때 여러 번 써레질했을 때보다 벼 생육도 좋고 잡초도 덜 생기더라는 겁니다.”
고민에 빠졌다. 농기계 수리업을 하면서 농기계 보급에도 앞장서왔는데, 농기계를 쓰면 쓸수록 농사를 망치는 길이라는 깨달음이 온 것이다.
“내가 농사 망치는 일을 ‘선진농업’이라고 선전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농기계 수리업을 접고 본격적으로 무경운 농업을 시작했죠.”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는 ‘신경다비’라 해서 깊게 갈고 얕게 써레질하라는 게 정부가 권하는 농법이었다. 그런데 아예 경운 하지 말라는 농법을 들고 나왔으니 여럿에게 눈총을 살 밖에.
“경운이란 게 뭡니까. 땅을 부드럽게 해서 작물이 잘 살아가게 하는 목적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물리적 경운에 매달리고 있어요. 경운기나 트랙터로 땅을 갈아엎는 겁니다. 이러면 한때 땅은 부드러워지겠지만 이게 토양을 죽이는 겁니다. 대신 생물학적 경운은 1년 내내 토양 미생물이 활동하면서 땅을 부드럽게 해주니 작물 생장에도 훨씬 좋다는 게 지금까지 태평농업을 하면서 얻은 결론입니다.”
태평농업 요체는 이모작을 하되 땅을 갈지 않고 비료·농약 전혀 안 쓰며 직파한다는 것이다.
“최근에야 ‘논 습지’라는 개념이 널리 알려졌지만, 저는 태평농업을 하면서 오래전 이 개념을 파악했고 그걸 실천해오고 있습니다. 논이 가진 큰 기능 중 하나는 장마철 홍수 대비입니다. 그런데 요즘 농법은 조기 파종이에요. 비가 오기도 전에 논에 물을 가두고 벼를 심습니다. 어느 정도 활착하고 생장을 시작할 무렵이면 장마가 오죠. 그러면 비료성분이 떠내려가거나 둑이 무너질까 봐 빗물은 죄다 하천으로 흘려보냅니다. 논으로 전혀 못 들어오게 하죠. 이게 어떻게 홍수를 방지하겠습니까.”
그는 장마가 시작되면 볍씨를 바로 논에 뿌린다. 물론 논을 갈지 않는다. 볍씨 뿌려놓고는 가을에 수확하면 끝이다. 그야말로 ‘천하태평’이다. 가을에 타작 하고나면 볏짚은 그대로 논에 깔아둔 채로 보리나 밀을 파종한다. 그러면 다시 다음 해 5~6월 수확한다. 보릿대나 밀짚은 역시 논에 깔아두고 장마가 시작되면 볍씨를 파종한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땅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작물입니다. 단지 사람은 적절한 작물을 선택해서 땅에 보내줄 뿐, 작물이 스스로 땅 주인으로서 땅을 가꾸고 자신도 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인삼과 산삼 예를 든다.
“인삼이나 산삼이나 같은 종류인데 성분은 천양지차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는 씨앗을 사람이 땅속에 심어줍니다. 그럼 그 씨앗은 숨을 쉬고자 줄기부터 땅 위로 내보내게 되죠. 하지만 산삼 씨앗은 저절로 땅 위에 떨어집니다. 살아남으려면 뿌리부터 땅속으로 내려야 하죠. 흔히 발아라고 하는데, 뿌리가 먼저 나느냐 줄기가 먼저 나느냐에 따라 생육 상황이 크게 달라집니다.”
한번은 방송 다큐팀에서 그의 논 단면을 파 봤단다. 그런데 벼 뿌리가 지하 1m까지 뻗어있더란다. 보통은 30㎝도 안 되는 데 말이다.
앞서 그의 학력을 밝혔듯이 이 씨는 무슨 학설이나 외국 사례를 참고할 능력은 안 된다. 하지만 체험에서 나온 알토란 같은 정보는 무슨 박사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다.
“보릿대를 걷어냈을 때하고 그냥 뒀을 때 보면 그냥 뒀을 때 잡초가 훨씬 적어요. 볏짚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다른 곳에 볏짚이나 보릿대를 깔아놔도 잡초가 나는 데는 크게 영향이 없거든요. 볏짚이나 보릿대에는 잡초를 억제하는 뭔가 성분이 있지는 않은 것 같고, 아마도 이모작을 통해 벼와 보리가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싶어요.”
최근 읽은 책 가운데 <채식의 배신>이 있다. 여기에는 “표토 1평방미터에는 서로 다른 동물 1000가지가 넘게 들어 있다. 어기에는 선충류 1억 2000만 마리, 진드기 10만 마리, 톡토기 4만 5000마리, 지렁이류 2만 마리, 연체동물 1만 마리가 들어있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렇게 많은 농부가 작물 생장을 도와주는데 물리적 경운법은 이들을 모두 배제하고 화학비료와 농약으로 사람이 땅을 지배하려 들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게 이 씨 생각이다.
그래서 근래 유행하는 ‘유기농’에 대해서도 그는 부정적이다. 결국 화학비료 대신 퇴비 같은 자연 비료를 쓰고, 농약 대신 오리니 우렁이니 하는 천적을 활용한다는 건데, 근본적으로 땅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면 ‘유기농’이라 부를 수 없다는 지론이다.
일본으로 도망가 숨어 살기도
2000년 인터뷰할 때 그의 마당에 서 있던 캠핑카 행방이 궁금했다. 당시로서는 캠핑카가 일반화되지 않았을 때인데 시골에서 농사짓는 그에게 ‘캠핑카’가 썩 어울려 보이지 않았던지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궁금해 했더니 그의 흑역사가 술술 나온다.
“아 그거요. 대구에 있는 어느 회사에서 제작해 달라고 해서 직접 만든 것입니다. 유럽 같은 데는 캠핑카에 침실과 조리시설만 있으면 돼요. 어디든 캠핑장에 가서 전기 연결하고 수도 연결해 쓰면 되기 때문이죠. 우리나라는 지금도 대부분 그렇지만, 캠핑카 안에서 전부 해결해야 합니다. 전기도 만들어야 하고, 음식 하고 씻을 물도 갖고 다녀야 하죠. 그래서 참 어려웠습니다. 지붕에 태양광 전지를 달고 물통도 설치하고….”
당시 1톤 트럭으로 캠핑카를 만들어냈으니 돈도 꽤 벌었겠다 싶은데 아니란다.
“처음에는 개발해주면 다달이 얼마씩 주겠다는 둥 했는데 막상 다 만들고 나니 자기들이 원하던 게 아니라며 툴툴거리면서 개발비도 못 주겠다더군요. 그래서 홧김에 ‘저딴 거 필요 없으니 가져가라’ 했더니 진짜 가져 가버리더군요. 그렇게 개발비만 들고 남은 건 하나도 없었죠.”
그의 흑역사가 이것뿐일까. 한창 태평농업을 널리 알리고 다닐 때였다고. 한 독지가가 있어 그린벨트 안에 있는 폐교를 구해 줄테니 태평농업 연수원으로 만들어보자고 해서 연수원을 만들었단다. 그린벨트 안이긴 했지만 교육시설이다 보니 별 문제 없이 연수원을 개원하게 됐는데, 막상 연수원이 되고 보니 처음 독지가는 물론 인근 주민까지 욕심을 내는 바람에 이 씨는 거의 쫓겨나다시피 그 일에서 손을 뗐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사실 내가 영악하지 못해 그런 것이니 그다지 아깝다거나 억울하진 않아요. 하지만 비료 때문에 일본에 도망가 숨어 지낸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납니다.”
그의 지론은 농사에 비료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질소는 비에 녹아내리는 것만 해도 넘칠 정도로 충분하고, 우리나라는 대부분 화강암토여서 인산도 필요 없다는 것. 하지만 당시 비료공업은 농업 생산력 증대를 위한 국책 사업이었다. 거기서 만들어 낸 것이 성분을 조금씩 달리하는 ‘복합비료’. 이 복합비료는 일본에서 일본 토양에 맞춰 개발한 것을 그대로 본뜬 것에 불과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비료공장에 몇 차례 이런 화학비료는 한국 상황에 안 맞으니 한국 상황에 맞는 비료를 만들어야 한다고, 질소와 인산은 필요 없고 칼륨도 그다지 필요 없다는 주장을 되풀이해댔더니 권력기관으로부터 협박도 받고 실제 위협도 받은 일이 있었다고. 그래서 일본으로 건너가 몇 년 숨어 살아야 했다.
귀농하려는 이들에게 조언한다면
어쨌거나 이제 그의 ‘태평농업’은 전국에 널리 알려졌고, 그에게 배워간 사람은 몇 만 명인지 헤아릴 수도 없다. 지금 서로 연락되는 사람들만 해도 300여 명에 이른다. 그에게 태평농업을 배워 가서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 사람들은 태평농업이 아니라 자신이 다른 이름을 붙여 그들 나름대로 또 전국에 전파하고 있다. 그러니 한 가지는 크게 성공했다고 해도 되겠다.
온난화 대응작물 연구도 서서히 성과를 내고 있어 요즘은 귀농하려는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실제 그의 연구소 마당 한쪽엔 서너평 되는 작은 조립식 건물이 있다. 지붕에는 종이 전지 한 장 남짓한 크기 태양광 발전기 2개가 설치돼 있는데 여기서 나오는 전기로 연구소 2층 건물에서 쓰는 전기까지 다 생산하고 있다고 했다. 12볼트 직류전기부터 350볼트 삼상 교류전기까지 마음대로 만들어 쓰는데 에어컨만 가동하지 못할 뿐 못할 일이 없다고.
실제 조립식 건물 안에는 탁상드릴링머신과 작은 선반까지 설치돼 있었고, 조도센서를 통해 자동 점멸기능이 있는 전등도 설치돼 있었다. 이 모든 시설은 스스로 연구·개발하는데 쓰이지만, 귀농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도 한다고.
“귀농하려는 사람들도 두 부류가 있습니다. 도시에서 삶에 실패했거나 환멸을 느껴 귀농하긴 하지만 역시 돈을 벌어야겠다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자연을 벗 삼아 소박하게 살고 싶어 귀농하는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어떤 이유건 나는 귀농하려는 사람들에게 ‘절대 욕심내지 마라. 많이 가지려 하지 마라’고 충고합니다.”
도시에서 크게 잘 살지 않았더라도 시골에 땅 250평 정도는 장만할 수 있으니 200평에는 태평농업으로 벼와 보리농사를 짓고, 15평 정도에 집을 짓고 나머지는 텃밭으로 일궈 채소 과일 심으면 4인 가족이 먹을거리는 충분히 나온다는 설명이다.
“우리나라 평균 4인 가족이 한 달에 쌀 15㎏ 정도 먹습니다. 1년이면 180㎏이죠. 논 200평에 태평농업으로 농사지으면 쌀이 4가마 320㎏이 나오고 보리나 밀도 1가마는 나옵니다. 다 못 먹어요. 더구나 태평농업으로 지질이 회복되면 쌀 속 에너지도 고농축이 되면서 한 달에 10㎏도 먹지 못하게 됩니다. 뭐하러 욕심부리겠어요?”
작게 소박하게 설계하되, 씀씀이도 아낄 수 있는 대로 아껴보라는 것. 그의 태양광 발전 시스템도 아끼는 것 중 하나다. 1년 내내 전기요금이 1원도 들지 않는데 도시에서 전기를 풍족하게 쓰던 시절과 비교해도 별로 아쉽지 않다는 것.
그러고도 여유가 있다면 후손을 위해 과일나무를 심으라고 했다.
아,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
“토종 과일나무를 심으세요. 단, 절대 접을 붙이면 안 됩니다. 품종 개량한다고 접을 붙이면 아무리 잘 관리해도 그 나무 수명은 15년입니다. 자연상태라면 몇 십 년을 살지 몇 백 년을 살지 모를 나무를 인간이 욕심부려 15년 쓰고 버린다는 건 옳지 않죠.”
추적추적 내리는 장맛비 때문에 비토섬 옆에 있다는 농장을 방문하지 못한 게 끝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 이 글은 ㈜경남도민일보사가 발행하는 인물 인터뷰 전문 월간지 <피플파워>에 게재됐습니다. 기록을 남기고자 블로그에도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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