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에 ‘인권’이라니 근사하잖아
형평운동은 1923년 4월 24일 조선의 최하층 신분 집단인 백정들에 대한 신분차별을 없애기 위하여 진주에서 결성된 형평사 활동을 일컫는다.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전한 이 단체는 1935년까지 인간 존엄과 평등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이러한 형평운동은 일제 침략기에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중추적인 사회운동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조선의 신분제 잔재를 없애고 평등사회로 나아가고자 한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인권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형평운동 기념탑 준공식 팸플렛.

1996년 12월 12일 진주성 정문앞에서 열린 형평운동 기념탑 준공식 팜플렛.
1923년 3월, 일제치하의 조선에서 백정들이 ‘인권’과 ‘권리’를 주장했다. 온갖 멸시와 천대를 철폐하고 인간답게 살고자하는 외침이었다. 그 외침은 진주에서 시작됐고, 진주 사람들이 후에 이를 기리고자 진주성 정문 앞에 ‘형평운동 기념탑’을 세웠다. 그게 1996년 12월 10일이었다. 인권선언을 기리는 뜻도 담았다. 그렇게 시민 1300여 명이 십시일반 염원을 모아 세운 형평운동기념탑이 철거될 처지다. 진주 지역에서 뜨거운 쟁점일 수밖에 없다. 진주에서 형평운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오늘날 형평운동기념사업회가 생길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던 김중섭(62)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를 만나봤다.
지난 4월 11일 경상대학교 연구실에서 만난 김 교수는 첫 마디처럼 정말 하고싶은 얘기가 많은 듯했다. 질문 할만한 것에 대해 알아서 줄줄 풀어냈다.
설령 형평탑을 이전하더라도 컨설팅 회사가 아이디어 내 놓은 걸 가지고 좋다고 고무도장 찍듯이 할 게 아니라 진주의 역사를 우리가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이런 걸 고민하고 해야하는데 너무 그런 것이 없어요.
그는 영국에서 형평운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중섭 교수가 형평운동기념사업회가 출범하게 된 계기부터 형평운동기념탑이 진주성 앞에 있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형평운동에 대해 쓰겠다고 했더니 주변에 어떤 교수는 ‘영국에 가면 유학을 공부한 사람도 많고 한데 왜 하필이면 백정 얘기 하려느냐’는 얘기도 하고 반응이 좋지 않았죠. 하지만 영국에서는 전혀 달랐습니다. 형평운동을 아주 높게 평가해주는 겁니다. ‘인권’이라는 개념이 2차 대전 끝나고 UN에서 인권선언을 하면서 정립됐는데 그보다 20여년 먼저 ‘인권’과 ‘권리’라는 단어를 썼다는 데서 더 그랬죠.
‘인권’. 인간이 인간답게 존재하기 위한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인간의 권리 및 지위와 자격을 뜻한다. 하지만 인권이라는 개념이 보편화된 것은 1948년 12월 10일 유엔 총회에서 당시 가입국 58개 국가 중 50개 국가가 찬성하여 채택된 인권에 관한 세계 선언문이 있고부터다. 그런데 1923년 일제 치하의 조선에서 이런 개념이 등장했다.
1928년 제6회 전국 형평사대회 포스터1923년 4월 24일 진주청년회관에서 형평사 발기회가 열렸고, 다음날 창립총회가 열렸다. 그리고 5월, 형평사의 영향을 받아 전북 익산에서 백정들이 ‘서광회’를 만들었다.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보도를 보면 창립 선언문에 ‘인권’과 ‘권리’라는 용어가 쓰였다.
백정! 백정! 불합리(不合理)의 대명사, 모욕의 별명, 학대의 별명인 백정이라는 명칭하에서 인권의 유린, 경제의 착취, 지식의 낙오, 도덕의 결함을 당하여왔다. … 여기에서 권리를 회복하고 자유를 해방하려는…. (서광회 선언문)
이를 두고 김 교수는 “이건 정말 근사한 역사”라고 평가했다.
학위를 받고 귀국한 어느 날, 미국에 있는 임순만 목사를 대학 연구실에서 만났다고 했다. 임 목사는 영어로 백정에 대한 논문을 썼던 이였다.
그게 1992년도예요. 그분이 오셔서 하는 얘기가 김 교수, 내년이면 형평운동 70주년이 되는데 이 중요한 역사를 그냥 놔둘 거냐는 겁니다. 이분 말씀을 듣는 순간 야 이거 그냥 있을 수는 없다. 형평운동을 어떻게든 기억하자. 이런 생각이 들었던 거죠. 그게 출발이었어요.
그렇게 형평운동기념사업회를 만들자고 생각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진주에 여러분들이 협조를 하게 됐는데, 그때 김장하 선생을 만나게 됐다고. “큰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김중섭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그렇게 형평운동 70주년 기념사업회를 만들고 김 교수가 총무를 맡았다. 그렇게 맡은 총무를 10년 동안 맡았다. 모든 궂은일을 스스로 맡아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에서 그랬다고 했다.
기념사업회는 3가지 사업을 하기로 했다. 해방 후 처음으로 기념식 한번 해보자, 국제학술회의를 준비하고, 기념탑을 세우는 것이었다.
김중섭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시민들에게 증표를 남겨주고자. 형평운동이 이렇게 귀중하다는. 그래서 탑을 만들자고 한 거죠. 그때부턴 정말 내가, 하다 보면 시간을 쪼개서 써야 하잖아요. 하지만 형평운동에 대해 얘기해달라고 하면 어디에라도 가서 정말로 아무리 늦은 시간일지라도 그 시간에 맞춰 가서 설명하곤 했습니다.
사실 사업을 하기로 결정은 했지만 잘 될까 걱정도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탄력이 붙으면서 1300여명과 38개 단체가 참가했고, 그 결실이 현재 진주성 정문 앞에 있는 형평운동 기념탑이다.
당시에 진주정신을 살리자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진주정신이 뭐냐. 그럴 때 형평운동이 굉장히 중요한 정신이다. 평등정신 이런 게 있다. 정말 1990년대 말에는 사회적인 분위기도 그랬지만, 역사를 새롭게 이해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형평운동기념탑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저렇게 쉽게 옮기려고 하는 데 대해 좀 이거는 아니라고 생각한 거죠.
당시 ‘진주정신’에 대한 열기가 어느 정도였느냐면 지방선거에 출마한 모든 시장 후보가 하나같이 ‘진주정신’을 살리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심지어 형평운동 기념관을 세우겠다고 공약하는 후보까지 있을 정도였다.
어쨌거나 형평운동기념탑을 세우기로 하고부터 탑을 세울 장소를 찾아 나섰다. 가장 먼저 후보로 떠오른 곳이 진주극장 자리였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진주좌’라는 극장이 있던 곳이었고, 1923년 5월 13일 형평사 창립축하식이 열렸던 의미 있는 곳이었다.
기념물은 역사 현장에 있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그래서 진주극장 자리를 가장 먼저 떠올렸던 거죠.
하지만 당시 윤기열 진주극장 대표가 장소를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너무 좁다는 데서 다른 장소를 물색했다. 대신 진주극장 자리에는 표지석을 세웠다.
진주성 정문 앞에 있는 형평운동 기념탑여러 장소를 물색하던 중 당시 백승두 진주지장이 시유지인 현재 터를 제공하겠다고 하면서 장소 문제도 해결됐다.
지금 탑이 있는 곳은 진주성 외성 안이었습니다. 백정들은 성내에는 살 수가 없었죠. 그러니 비록 외성이라고는 하지만 성 안에 기념탑을 세움으로써 백정들의 한을 달래주자는 의미도 컸습니다.
진주에는 백정촌이 두곳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한 곳은 진주 사람들이 ‘배건네’라고 부르는 망경동 일대이고, (나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김 교수가 자신이 취재한 내용과는 다르다고 알려왔습니다) 한 곳은 진주성 서장대 밑 나불천과 만나는 지점이었고, 나중에는 숱골로 옮겨갔으며, 다른 한 곳은 지금의 동방호텔이 있는 곳에서 옥봉동으로 (이 역시 김 교수가 후에 알려준 내용입니다) 수정동으로 이르는 일대였다. 그들의 혼백이나마 성내로 모셨다는 의미다.
형평탑은 애초 1993년 70주년 기념식에 맞춰 제막할 계획이었지만 3년이 더 걸려 1996년 말에야 제막식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일이 오래 걸린 것이 지나고 나서 보니 더 좋았다고 말했다.
진주 역사도 긍정적인 측면을 설명하고 있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있어요. 이 둘 가운데 무엇이 더 중요하게 인식되고 존중되는가 이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형평운동 반대운동도 진주가 맨 처음 일어나요. (1923년 4월 24일 발기인대회, 25일 창립총회가 개최됐지만, 5월 24일 농청을 중심으로 반형평운동이 일어나고 쇠고기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진주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는데 농민항쟁 이면에는 탐관오리가 있었다는 거죠. 농민항쟁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은 관에 빌붙어 있던 협력하고 있던 세력이 있었다는 거죠. 이 둘이 언제나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교육운동이 활발하게 진주에서 벌어졌지만 그것이 꼭 그렇게 순조롭게 이뤄지지 않은 측면도 있거든요. 그런데도 공동체 정신을 살리려는 노력이 이렇게 면면히 흘러오게 됐던 것은 이것을 존중하는 긍정적인, 선각자적인 것이 굉장히 중요한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존중받아왔다고 생각해요. 이럴 수 있느냐 없느냐 이거는 다르다는 거죠.
형평운동기념탑을 보면 90년대 중 후반까지는 이것이 굉장히 각광받았던 시기였지만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기억하지 않을 뿐 아니라, 터부시까지 한다. 시대가 달라졌는데, “어느 시점에는 지금 비움 같은 것이 다 쓸어버리겠지만, 어느 시점에 가면 굉장한 과오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길게 역사적으로 보면 조급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인터뷰 처음에 그는 “탑을 옮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무리에서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경상대 김중섭 교수 인터뷰 from digilog4u on Vimeo.
경남도민일보에 기고하면서도 그 자리에 그대로 둔다기보다는 성 앞에 둔다는 표현을 썼어요. 그자리가 형평사 행사가 열렸던 장소라면 더 고집을 해야겠지만 재배치할 수는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다 비운다’는 콘셉트인데 이게 거추장스럽다 그래서 어디론가 옮긴다 이거는 잘못된 거죠. 순서가 잘못된 거죠.
다음은 형평운동 기념탑 건립에 기부한 사람과 단체 명단.
※이 글은 <경남도민일보>가 발행하는 인물 인터뷰 전문 월간지 <피플파워> 2016년 5월호에 게재됐습니다. 인터뷰 원문은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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