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이가 합천군수와 ‘화려한 휴가’를 함께 보겠단다
나는 영화를 즐겨 보지는 않습니다. 영화 뿐만 아니라 TV도 그다지 즐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들과 아내가 졸라대는 통에 어제 극장에 갔습니다. 도떼기 시장마냥 붐비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저는 오히려 더 신기했습니다.
하여튼 애들은 <디 워>를 보러가고, 저와 아내는 <화려한 휴가>를 보았습니다. ‘눈물 많이 나온다더라’며 미리 손수건을 챙긴 아내와 함께하는 정말 모처럼만의 ‘영화 데이트’는 세월을 10년 쯤 뒤쪽으로 돌려놓은 듯 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두가지 이유로 그 기분이 싹 가셨습니다.
순결주의를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80년 광주’를 정치인이 난도질 하더니만, 상업적으로도 ‘광주 정신’을 팔아먹는구나 싶어 씁쓰레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영화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메이킹 필름’ 시간에 직원들이 출구 문을 열고 들어와 무대 아래로 지나가는 등 관객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아내에게 눈치 보여 흘러내리는 눈물을 한번도 닦아내지 않고 말려 가면서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메이킹 필름을 보면서 마지막 눈물을 말리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를 방해한 극장 직원들, 끝내 아내에게 눈물을 보이게 한 그 직원들이 정말 쥐어패주고 싶을만치 미웠습니다.
사실, ’80년 광주’는 그렇게 가벼운 주제는 아닙니다. 80년 광주의 경험도 제가끔일 것입니다. 나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 때 중 3이었는데 우리학교 기술 선생님으로 첫 발령 받아온 이가 광주 출신이었습니다. 그해 우리 학교에는 기술·미술·과학 선생님이 모두 여선생님으로 초임이었고, 음악 선생님까지 해서 처녀 선생님이 네분이었습니다. 나는 그 중 기술 선생님을 제일 좋아했습니다. 개구쟁이였던 나는 첫 발령 첫 수업에 들어온 선생님께 ‘죽도록’ 얻어맞았습니다. 그 일로 인해 선생님과 의외로 통하게 됐고, 또 천성이 뭔가 뚱땅거리며 만들고 부수고 하는 일을 좋아했던 나로서는 기술 과목에 갖고 있던 호감까지 더해 선생님과 참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5월 말께 월요일이었습니다. 그날 기술 수업이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도 죽~ 오시지 않았습니다. 흉흉한 소문만 들릴 뿐이었습니다. 광주 집에 갔다가 폭도들에게 잡혀 못오신다거니, 공수부대에 잡혀 돌아가셨다거니 하는 나쁜 소문 뿐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아, 광주라는 곳은 갈 곳이 못되는구나. 사람을 잡는 동네인가 보다’는 참 어리석고 순진한 생각을 했습니다. 2학기 개학을 했을때 선생님은 오셨습니다. 그러나 왜 1학기 절반을 수업에 못들어오셨는지, 흉흉한 소문의 진상이 무엇인지는 끝내 함구하셨습니다. 그게 내가 겪은 광주의 첫 모습이었습니다.
대학에 가서 ‘광주’의 실체를 조금씩 알아가면서 받은 충격은 아마도, 내 또래라면 거의가 같이 겪었을 아픔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뒤, 광주를 충격이나 ‘아픔’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이해한다고 생각할 무렵 나온 영화 <꽃잎>은 또다른 충격이었습니다.
내가 알고 있던 광주는 박제화되고 정치화된 것이었을 뿐 사람의 ‘삶’이 빠져 있었다는 것을 깨우쳤습니다. 옆에서 연방 사람이 죽어 나갈 때 겪어야 했을 그 ‘사람’들의 정신적 공황, 죽음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실체에 대한 이해 없이 구호로 남은 ‘광주 해방구’를 떠들고 다녔던 일이 몹시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10여년. 상황은 많이 달라졌는데도 영화는 <꽃잎>에서 <화려한 휴가>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10여년 전 <꽃잎>이 ‘소녀’와 ‘우리들’의 추억담으로 풀어간데 비해 <화려한 휴가>는 그 난리통 전쟁통 속으로 화자가 들어갔다는 정도가 달라졌다면 달라진 것이었습니다.
<화려한 휴가>는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멜로 영화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단지 눈물샘을 사정없이 쥐어 짤 ‘최루’탄으로 광주를 소품화 한 것이라고 봅니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화 속 그 사람들은 목숨을 내 건 영웅적 투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광주의 전형을 담아내지는 못했습니다. 영웅적 투쟁의 동력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한 발 떨어져서 보자면 정말 ‘폭도’였습니다. 국가권력에 저항해 총을 들고 싸우다 숨졌으니 폭도요 반란군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왜 이들이 ‘폭도’가 아니고, ‘반란군’이 아닌지에 대해 설명하는데 인색했습니다. 죄없는 내 친구가, 내 가족이 공수부대에 맞아 죽고, 총맞아 죽었다고 해서 나선 이들의 싸움은, 그것만으로는 정당화 되기에 부족합니다. 이는 영화 속 ‘신부’가 말했던 “가만 있는 개를 걷어찼다. 그랬더니 짖는다. 이제 개를 잡을 명분이 생긴 것이다”(발언 내용이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들었습니다)는 대사 한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전두환 전 대통령이나 심의조 군수가 본다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만 할 것이라고 봅니다. 실제로 광주청문회를 거치면서 드러난 것들을 보면 당시 군부는 과잉 진압이 항쟁을 더 키울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도 무자비한 피의 살육을 벌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광주는 ‘여전히’ 폭도이고 ‘북괴의 지령에 놀아나는 국가 전복세력’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다는것을 이 영화는 외면했거나 빼먹었습니다.
이제 광주는 그렇게 비장하지 않고도 화제에 올릴 수 있을만큼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영화를 전두환 전 대통령이나 심의조 합천군수와 함께 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참,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오해할까봐 덧붙입니다. <화려한 휴가>는 잘 짜여진 영화입니다. 단지 현재의 정치상황이나 합천군의 ‘일해공원’ 논란에 억지로 끼워맞추려는 것은 지나친 ‘오버’라는 점을 얘기하려다 보니 영화의 부족한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얘기했을 뿐입니다. 영화는 영화로 감상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광주를 다룬 책만 해도 수백 수천권이 될 것입니다. 다큐멘터리도 많고 사진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것으로 채우지 못한 부분을 영화가 소설이 예술이 담아냈다면, 그 장르의 문법으로 감상하고 이해하면 족할 것입니다.
이제 전국 영화관에 두 번째로 내걸린 ‘광주’ 영화를 보고 ’80년 광주의 진실’을 제대로 담았니 못담았니 하는 논쟁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해서 ‘영화’로서의 가치마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영화에 지나친 정치적 의미 부여를 경계할 뿐입니다.
끝내 아내에게 들켜버린 눈물로 멋쩍기는 했지만 정말 얼마만인지 모르게 참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카타르시스’라고 하던가요.
2007.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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