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창녕 관룡사 약사전
지난 주말, 11시쯤 늦은 아침을 먹은 아내가 뜬금없이 “소원이 있는데, 빌어보게 어데 가까운 절에라도 가자”랍니다.
어디로 가볼까 고민하다가 오래전 김훤주 기자가 추천했는데 한번도 못가봤던 창녕 관룡사가 떠올라 가보기로 했습니다. 김 기자 추천을 받고 10여년 전쯤 온 가족이 부곡하와이에서 1박한 다음날 나를 뺀 나머지 가족은 다 다녀왔지만, 나는 일요일 출근해야하는 바람에 가보지 못했던 아쉬움도 작용했습니다. 더구나 ‘한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세간의 소문도 그쪽으로 발길을 옮기게 한 까닭을 더했습니다.
◇관룡사는?
위키백과 관룡사 조에 따르면 아래와 같습니다.
관룡사(觀龍寺)는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에 있는 사찰이다.
해발 793m의 관룡산 서남에 위치하고 있는 관룡사는 산내에 전하는 석조불상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추정되지만 그 창건경위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조선 태종 원년(1401)에 대웅전이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광해군 9년(1617)에 다시 짓고 그 후 영조 25년(1749)에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른다. 관룡사 내에는 관룡사 약사전 삼층석탑(유형문화재 제11호), 용선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95호), 관룡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19호), 관룡사 약사전(보물 제146호), 부도 등의 많은 불교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보면 맨 먼저 이 건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범종루 뒷면입니다.

관룡사 범종루 뒷편.
사찰 경내로 들어가는 길은 널따란(차가 지나갈 수 있는 폭) 길도 있지만, 이처럼 계단으로 오르는 길도 있습니다. 계단 끝부분에 무슨 문 같은 건조물도 있네요. 이리로 올라갔습니다.

관룡사로 올라가는 돌계단.
사대천왕이 버티고 있는 문을 들어서면 문화재 안내간판이 3개 있습니다.(이곳 사천왕은 돌조각이나 나무조각이 아니라 그림으로 돼 있더군요) ‘한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관룡사’, ‘관룡사 사적기’, ‘관룡사 원음각’이 그것입니다.
비스듬히 대웅전이 보이는데, 대웅전 뒤를 감싸듯이 안고 있는 뒷산의 ‘병풍바위’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하지만, 내 사진 실력이 워낙 젬병인지라 그 느낌을 오롯이 표현할 길이 없네요. 이날은 전날 밤 폭우가 언제 쏟아졌느냐는 듯, 흐리고 가끔 가랑비가 조금씩 흩날리는 정도의 날씨였습니다. 그러니 병풍바위가 운무에 휩싸여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카메라로는 내 눈에 보이는 그 모습 그대로를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약간의 보정을 거친 것입니다.
관룡사 대웅전과 뒤를 감싸고 있는 병풍바위.아내가 대웅전에 들어가 기도하는 동안 나는 절 경내를 이리저리 둘러봤습니다.
◇관룡사 약사전
대부분 절에는 ‘약사전’이라는 게 있습니다. 약사전은 ‘약사여래불’을 주불로 모신 전각입니다. 약사여래불은 말 그대로 ‘약사’처럼 중생의 병든 몸을 보살피는 부처입니다. 생로병사 가운데 ‘병’을 주로 다룬다는 겁니다.
하지만 어쩐 영문인지, 사람의 소원을 가장 잘 들어주는 부처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소원을 잘 들어준다’는 절에는 대부분 ‘약사전’이 있으며, 소원은 이 약사전에서 빌어야 잘 이뤄진다는, 그런 속설도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죠.

관룡사 약사전.
관룡사 약사전에도 그런 전설같은 얘기가 있습니다. 법당 안 촬영을 금지한다는 안내문을 보고 불상 촬영은 포기했습니다만, 여기 모셔진 불상은 보물 519호로 고려시대에 모셔졌다고 합니다.
관룡사는 임진왜란때 전부 불탔는데, 오직 약사전만이 화마를 피했다고 합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영운’이라는 고승이 약사전을 살펴봤더니 대들보에 ‘永和5年己由'(영화 5년 기유)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이때는 서기로 349년에 해당한다네요. 임진왜란이 1590년대에 벌어진 전쟁이었으니 그때로 보더라도 1200여 년이 된 건물이었던 겁니다. 그런데도 화마를 피했으니 영험이 있다고 알려졌고, 뒤에는 소원을 들어준다는 속설이 퍼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이건 내 추측입니다. 안내에는 영운이 처음부터 소원을 들어준다고 여겼다고 돼 있더군요.)
약사전 앞 3층 석탑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관룡사 약사전 앞 3층 석탑.탑 옥개석 귀퉁이가 많이 깨어진 것이 세월의 흔적을 말하는 듯했습니다.
◇ 용선대 가는 길
대웅전에서 용선대로 이르는 길은 430미터라고 돼 있었습니다. 왕복 1km가 안되는 거리입니다. 가랑비가 부슬부슬 뿌리니 카메라가 물에 젖을까 걱정되긴 했지만, 올라가보기로 했습니다.
석조여래좌상을 친견하기 전, 올라가는 과정에서도 눈과 귀가 즐거웠습니다.
용선대로 올라가는 길에서 내려다 본 관룡사 모습.관룡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더군요.
가는 길에 발견한 이 소나무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오래된 나무가 어디 제 나름 아픔과 기억을 간직하지 않은 것이 있을까만, 단지 사람이 몰라줄 뿐이겠죠. 하지만 가끔 이런 나무가 있어 그 내력을 상상이나마 해보게 합니다.
용선대 오르는 길에서 발견한 소나무. 이 나무는 무슨 내력이 있어 이렇게 비틀리면서 자랐을까 상념에 잠겨봤습니다.거의 다 올랐다 싶을무렵 어디선가 우렁찬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관룡사와는 능선 반대쪽에서 들려오는데 카메라 렌즈로 당겨봤더니 사방사업을 한 계곡으로 물줄기가 힘차게 흐르는군요.
여기에 이르기 전 이미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을 올려볼 수 있었습니다.
아래쪽에서 올려다본 용선대 석조여래좌상.통일신라시대라면 적어도 지금부터 1700여년 전인데, 당시 사람들은 이 바위 위에 어떻게 올라와서 불상을 조각할 수 있었을까 경이로웠습니다.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불상을 이리저리 촬영도 하고 둘러보면서 몇가지 궁금증과 아쉬움이 교차했습니다.
궁금증은, 좌대와 불상이 같은 화강감 재질인 듯했는데 색깔이 현저하게 다르다는 점이었습니다. 둘 중 하나는 통일신라시대 작품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은 의심이 들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손을 댄 흔적입니다.
오래되다 보니 여기저기 흠집이 나 있었습니다. 특히 턱 아래쪽으로는 돌이 떨어져 나갔더군요. 하지만 그 나름대로 세월의 흔적을 담고 있어 괜찮아보였는데, 불상 목 오른쪽 부분에는 시멘트로 보수한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 보여 아쉬웠습니다.
턱 아래쪽이 훼손된 석조여래좌상. 목 부분에 시멘트로 보수한 흔적이 선연한 모습.어쨌거나 1700여년 전 이 불상을 조각한 석공은, 이 불상은 어디를 내려다보고 있었을까요?
사진에서는 위와 같은 풍경인데, 당시도 이랬을까요?
불상은 꽤 공을 들였다 싶은게, 뒷면의 옷 주름까지도 자세히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뒷모습.어쨌거나, 나는 그동안 마음에 빚처럼 남아있었던 관룡사를 둘러볼 수 있어 좋았고, 아내는, 그동안 그렇게 많이 가봤던 절에서 단 한번도 절하거나 기도하지 않았던 아내가 소원을 빌고자 했다는 새로운 역사를 쓴 하루였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만난 물 흐르는 모습은 덤입니다.
저도 꼭 하나 빌 것이 있는데 조만간 찾아야겠습니다.
간절하면 이뤄진다고 하죠. 함 다녀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