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에게 배우는 대한민국 정치 현실

여기 쥐들의 나라가 있습니다. 아, ‘쥐박이’라거나 그런 위인의 이야기는 절대, 네버, 아닙니다. 정말로 순수한 ‘책’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 나라에서는 5년마다 지도자를 뽑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쥐 나라에서 매번 지도자로 뽑히는 것은 쥐가 아니라 고양이였습니다. 어느 해 검은 고양이가 지도자로 뽑혔고, 어느 해에는 흰 고양이가 뽑히기도 했습니다. 또 어느 해에는 반은 희고 반은 검은, 또는 점박이 고양이가 뽑히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지도자 색깔은 바뀌기도 했지만, 새로 뽑힌 지도자는 매번 쥐들을 위한다는 정책을 내놓는 게 하나같이 쥐가 아니라 고양이들에게 좋은 정책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지도자로 뽑힌 검은 고양이는 쥐구멍이 고양이의 발이 들어갈 수 있도록 충분히 커야 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또 다른 지도자로 뽑힌 고양이는 쥐구멍이 둥글어서는 안되고 사각형이어야 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결과적으로 고양이의 두 발이 들어갈 수 있게 커지도록 했습니다. 어떤 지도자는 쥐들이 일정속도 이하로 달려야 한다는 법안도 통과시켰습니다. 물론, 고양이가 좀 더 손쉽게 쥐를 잡아먹을 수 있게 하는 법이었으며 나라의 주인인 쥐가 아니라 고양이에게 한결같이 유리한 법들이었죠.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는 캐나다 정치인 토미 더글러스가 1962년 캐나다 의회에서 연설한 내용입니다. 이미 인터넷을 통해 캐나다의 식품 및 유통노동조합 소속 NDP(New Democratic Party) 회원들이 만든 동영상이 널리 퍼져 있지요. 토미 더글러스는 국가권력이 노동자의 정당한 목소리를 탄압한 것에 항거하고, 또 질병으로부터 고통 받는 국민을 위해 노력한 북미 지역 최초의 민주사회주의 정부(캐나다 서스캐처원 주 지방정부) 수상입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갈한 그의 연설은 50년이 지난 지금의 대한민국에 갖다 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통렬한 비유입니다.

어느날 그 쥐의 나라에 똑똑한 생쥐가 나타나서 외칩니다. “우리는 왜 생쥐를 지도자로 뽑지 않는 거지?” 그러나 쥐들은 “오, 빨갱이가 나타났다”고 외치며 그 똑똑한 생쥐를 감옥에 가둡니다. 이게 1962년 캐나다에서 연설한 것일까요 2012년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일일까요? 2012년 대한민국에서는 ‘안철수’라는 아이콘으로 ‘생쥐들의 정부를 뽑자’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색깔만 바꾼 고양이들로 구성된 정부를 뽑고 말까요?

기득 권력이 사회를 지배하는 방식은 지구 어느 나라든 똑같습니다. 합법을 가장한 선거는 왜곡되고, 변화를 갈망하는 세력은 매도됩니다. 지난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수도권에서 서민의 욕망을 건드린 뉴타운 등의 공약으로 완승을 이끌어냈습니다. 대선에서도 ‘경제 살리기’ 공약으로 서민들에게 잘 살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완벽히 도둑적인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그들의 공약이 허황했거나 거짓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진실했습니다. 단지, 그 대상이 1%라는 부자들이었을 뿐이었지요. 마우스랜드에서 고양이들로 구성된 정부처럼 말입니다.

올해는 20년 만에 총선과 대선이 함께 열리는 해입니다. 이번에는 고양이가 아니라 생쥐로 구성된 정부를 선택할 기회가 눈 앞에 놓여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을 지내기도 한 정운현 선생님은 “여러분 ‘빨갱이’라고 기득 권력이 매도한대도 당신의 생각은 절대 잡힐 수 없으니, <나꼼수>의 말처럼 절대 쫄지 마십시오. 정말 이번엔 바꿀 수 있습니다.”라고 추천사를 썼네요.

<마우스랜드> 토미 더글러스 연설, 한주리 그림, 39쪽, 책보세, 6000원.

이번에는 다른 쥐 이야기입니다. 두 집이 이웃에 있었습니다. 한 집에는 검은 고양이와 검은 쥐들이 살았고, 다른 한 집에는 흰 고양이와 흰 쥐들이 살았습니다. 그 중 흰 고양이와 흰 쥐가 사는 집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어느 날 흰 고양이는 하루 종일 흰 쥐들을 쫓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흰 고양이는 힘이 빠져 눈 앞의 쥐들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도망치다가 지친 흰 쥐들도 고양이의 눈치를 보며 헐떡이고 있을 때 이웃에 사는 검은 고양이가 나타나 흰 쥐 한 마리를 낚아채갔습니다.

친구를 잃고 슬퍼하는 흰 쥐들에게 흰 고양이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처음부터 나에게 먹혔다면 이런 수모를 겪지는 않았을 거 아냐? 하루 종일 내게서 도망친 것이 고작 검은 고양이의 배를 채워 주기 위해서였어?”

흰 쥐들은 의논 끝에 검은 고양이에게 먹히는 수모를 당하는 것보다는 흰 고양이의 먹이가 됨으로써 검은 고양이의 침탈을 막고 흰 쥐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고 결론 지었습니다. 너도나도 흰 고양이의 먹이가 되겠다고 나섰고, 어떤 흰 쥐는 더 좋은 먹이가 되기 위해 억지로 제 살을 찌우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흰 쥐들은 옆집에 산다는 검은 쥐들을 본 적도 없다네요. 그들이 정말 검은 색인지조차도.

최규석 작가가 쓰고 그린 <지금은 없는 이야기>라는 우화집에 실린 ‘흰 쥐’라는 단편이었습니다. 앞의 마우스랜드와 오버랩되는 내용이어서 소개했습니다만, 내가 ‘깜딱’ 놀랐던 것은 같은 책에 실린 ‘불행한 소년’입니다. 불행하게 태어난 소년에게 가끔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그 소년이 자신의 불행을 극복하고자 용기를 낼 때마다 말입니다. 천사는 “네가 먼저 참고 용서하면 그럼 언젠가는 그 들도 자기 잘못을 뉘우칠 거야”라고 속삭입니다.

그렇게 불행한 소년은 불행한 청년이 됐고, 천사의 속삭임을 위로 삼아 참고 견디며 살다보니 어느듯 늙고 병든 노인이 돼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오직 천사만이 노인의 곁을 지켰고, 노인은 천사에게 “천사님이 시키는 대로 참고 용서하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아무도 없는 곳에서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네요.”

그러자 천사가 말했습니다. “비참하다고 말하지 마세요. 당신의 삶은 가치 있는 삶이었어요. 그리고 아직 제가 옆에 있잖아요.”

최 작가의 이 책에는 여러 우화가 등장합니다. 때로는 불편하기도 하고, 때로는 열불이 뻗히기도 합니다. 정말 ‘지금은 없는’ 이야기인만큼 생각할 거리도 용기를 다잡을 거리도 많습니다.

<지금은 없는 이야기> 최규석 지음, 199쪽, 사계절, 1만 3000원.

문제는 이런 책을 읽는다고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책을 읽고 감동하고, 그 감동을 글로 적고 하더라도 바뀌는 것은 없다는 것이지요. 행동으로 옮길 때,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큰 힘 들이지 않고도 적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방법으로 행동할 때 비로소 뭔가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정운현 선생님 말씀처럼 정말 쫄지 말고 이번에는 제대로 한 번 권력을 바꿔봅시다.

디지로그

축구가 좋은 축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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