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치 이야기 1 – 무지개다리를 건넌 뭉치

우리집에는 ‘뭉치’라는 ‘얼매(얼라+할매)’가 함께 살’았’다.

요크셔테리어 잡종이다. 아마 열아홉살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우리집에 온지 17년 됐고, 올 당시 두살이라는 얘기를 들었기에 그렇게 생각한다.

그동안 많이 아팠던 뭉치였기에,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는 안도했지만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다는 생각에 다들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무지개 다리’를 건너간 뭉치의 명복을 빌었다.

그런 뭉치가 지난 11월 23일 고난의 삶을 마감하고 고요히 숨을 멈췄다

수의를 입고 국화꽃고 함께 떠날 채비를 마친 뭉치.

그날은 월요일이었다. 나는 출근해서 일하고 있었다. 아내와 딸아이는 다음날 집을 떠나기로 예정돼 있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장모님 간호하다가 잠시 집에 온 아내, 대면 수업이 없어 잠시 집에 다니러 온 딸아이. 화요일 이 둘이 집을 떠나고 나면 다시 나혼자 뭉치를 간호해야 할 형편이어서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더랬다.

월요일 오후 4시쯤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뭉치가 갔다고.

전화를 받고는 바로 흡연실로 갔다. 깊숙이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면서도 혼란스럽거나 충격적이라거나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있을 때 잘해줄 걸’ 싶은 후회와 함께 ‘부디 다음 생이 있다면 좋은 주인 만나 더 행복하게 살려무나’ 중얼중얼 명복을 빌었다.

회사에 사정을 말하고 오후 7시쯤 퇴근해 집으로 왔다. 그 사이 울산에 있는 아들도 집으로 왔다.

아내는 낮에 집 인근 동물병원에 가서 이미 ‘사망진단서’를 떼어놨고, 화장장에도 예약을 해뒀다. 김해시 한림면에 있는 동물화장장에 도착했을 때는 밤 9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도착하니 여성 동물장례지도사가 엄숙하게 맞아줬다. 일단 염습할 장소에 뭉치를 안치하고 잠시 상담을 했다. 수의는 어떤 걸로 할지, 관은 어떤 걸로 할지를 결정하는 과정이었다. 뭉치는 생전에 옷을 입는 것을 싫어했다. 단지 장거리 여행을 떠날 때, 우리가 집을 떠날 기미를 보이면 지 옷이 있는 상자 앞에 가서 낑낑거렸다. 집을 나설 때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듯했다. 그래서 수의는 입히는 형식이 아니라 요와 이불처럼 몸을 덮는 형식을 선택했다. 다음은 관을 선택할 차례였는데 관은 쓰지 않기로 했다. 비싸기도 했고 ‘과공비례’라고 지나친 공손은 예의가 아니라고 했는데 장례지도사가 뭉치에게 지나치게 공손한 것이 낯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정하고나니 염습실로 갔다.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있는 뭉치의 온 몸을 알콜솜 같은 것으로 깨끗이 닦아내고 안면을 마사지하면서 눈을 감겼다. 장례지도사는 “강아지는 얼굴 근육이 발달해있어서 죽어서도 눈을 뜨는 경우가 많다. 지금 감기지만 곧 뜰 수도 있다”고 말/했다. 털을 가지런히 빗질하고 나와 아내가 앞뒷발을 맡아 발바닥을 깨끗이 닦아냈다.

추모실에는 모니터를 통해 생전 뭉치의 모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엽습 후 수의를 입히고는 추모실로 이동했다. 미리 보내놨던, 행복했던 시절의 사진이 모니터에 나오는 속에서 우리는 국화꽃 한송이씩을 바치며 다시 명복을 비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는 정말 뭉치를 떠나보내야 할 시간. 화로 앞에서 유리창 너머로 마지막으로 뭉치의 모습을 봤다. 그때까지 침울하기는 했지만 슬프지는 않았던 나도 눈물 한 방울 뚝 떨어뜨렸다.

뭉치가 화로 속으로 들어가고 유리창은 브라인드로 가려졌다. 그리고 확 퍼져 들리는 불이 활활 타오르는 소리. 그렇게 뭉치는 한줌 재가 되고 있었다.

30여분 걸리는 동안 장례지도사와 함께 2층에 있는 봉안당을 둘러봤고, 화장 후 ‘분골’(부순 뼛가루)을 어떻게 처리할지 상담을 했다. 내 생각에는 굽지 않은 토기에 담아 집에 적당히 함께하다가 수목장을 하면 좋겠다 싶었다. 굽지 않았기에 빗물에 자연스럽게 녹아 부서질 것이므로 환경에 미치는 영향도 없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땅에 묻는 건 결사반대했다. 살아 아파트 공간에 갇혀 살았는데 죽어서도 땅속에 가두는 것 같아 싫다는 거였다. 그래서 색동주머니에 담아 집에 함께하다가 바람 부는 곳에-뭉치가 바람을 정말 좋아했다- 가서 조용히 뿌려주기로 했다.

인골도 마찬가지지만 동물 분골도 아무데나 뿌리면 위법이다. 단지 자신 소유의 산이나 땅이라면 괜찮다. 장례지도사가 이 말을 다시 깨우쳐주며 분골을 넘겨줬다.

그렇게 장례절차를 다 끝내고 집에 오니 밤 11시 30분쯤 됐다.

이 글을 쓰는 현재 뭉치가 떠난지 거의 3주가 돼간다. 분골은 딸래미 자취방에서 딸고 함께하고 있다. 아내와 딸은 집을 떠났고, 나는 홀로 집을 지킨다.

한 사나흘은 퇴근 후 집에 와 현관 비밀 번호를 누르면서 ‘뭉치가 왜 조용하지? 왜 짖지 않지?’ 착각하다가 집에 들어선 후 ‘아 뭉지는 갔지’ 싶은 공허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것마저도 객관화해 볼 수 있을 정도로 안정을 찾았다.

디지로그

축구가 좋은 축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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