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도 장사꾼 마인드 없으면 백전백패”
“이곳에 김의 제국을 세워볼 요량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만의 공간을 만들겠다는 것은 아니고요…. 뭐 이를테면 ‘에코 뮤지엄’ 같은 것이지요.”
작달막한 덩치에 그렇게 큰 꿈이 어디에 담겨 있나 싶을 만치 당찬 사내, 김현철(55·진해시 소사동)) 씨. 두 시간 가까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에게서 일종의 ‘광기’를 느꼈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렇게 큰 꿈을 이렇게 손쉽게 이야기할 수 있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런 모습 이면에는 바보스러울 만치 솔직함도 품고 있었다.
‘예술사진관’이라는 간판을 내건 마을 사진관 모형. | ||
“정기자. 들어보니 어때? 교만하리만큼 자신만만하지 않아?” 그랬다. 그는 지나치게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냈고, 그의 표현대로 지나치게 자신만만했다. 이런 식이다. “나는 문화 장사꾼이에요. 처음부터 비즈니스로 접근하는 거요. 그래서 나를 ‘문화인’으로 해석하려 들면 피곤해져요.” “한국 대중문화는 라디오 매체 등장으로 발생했어요. 그런 대중문화 코드를 들여다보니 철저하게 스타가 있어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저의 어머니를 스타로 부각시키려 합니다. 왜냐구요? 산 사람을 스타로 만들면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대체로 죽은 자에게는 관대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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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근대사 자료 = 그의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왔을까? 스스로 “몇 점인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할 정도로 방대한 근대사 관련 자료에 바탕이 있다. 그는 지난 1987년부터 2003년까지 남의 집을 돌며 유물을 수습했다. 그렇다고 훔쳤다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그리한 것은 아니고, 어찌하다 보니 유물 수습 전문가로 알려지면서 집주인의 요청을 받고 그리했다. 그동안 수습한 집안이 한둘이 아니다. 심지어 전직 대통령의 장인이 남긴 유물을 수습하기도 했다.
그렇게 모은 유물이 몇 점인지는 그도 가늠하지 못한다. 기자는 그의 유물 창고를 운 좋게 두 번 둘러볼 수 있었다. 처음은 3년 전이었다. ‘김씨 공작소’라는 간판만 휑뎅그레 달려 있는 그의 집에서였고, 두 번째는 지난 4일이었다. 두 번째는 유물이 얼마나 많은지가 관심사가 아니었기에 대충 둘러보았지만, 첫 번째 만났을 때 온갖 신기한 잡동사니부터 시작해서 오래된 신문·잡지, 성냥 같은 공산품, 그가 디자인해 한때 히트를 쳤던 캐릭터에 이르기까지 몇 시간을 유물을 살피는데 보내야 했다. 지금도 20여 평 되는 창고가 진해 소사동과 부산에 있으며, 그의 모친이 살던 집에도 수없이 많은 유물이 쌓여 있다.
스스로 “개화기 산업화 관련 자료는 철저히 수집했다”고 할 정도로 근대기 컬러문화·시각문화에 대한 다양한 자료를 확보했다. 자신을 ‘이발소 그림 전문가’라고 이를 만큼 그 분야 자료도 많다. 그의 누리집 ‘김씨 박물관(http://www.kimc289.kp.st/)에는 △대중문화 100년 △산업사회 100년 △키치 100년 △대중가요 100년 △성풍속 100년 △교육 100년이라는 6개 카테고리로 자신의 자료를 분류해서 전시해두고 있다.
그런 자료에 바탕해 그는 생소한 주장을 했다. “40~50대 이후 사람들은 집에 베틀이 있는 것을 보았을 거에요. 그게 마치 조선시대나 그 이전부터 그리했을 거로 생각하는데 착각이죠. 1908년 섬유산업이 부활한 것입니다. 일본서 질 좋은 실이 들어오면서부터 집집이 베틀을 놓게 된 거지요.” 당시 조선팔도에 2만 3000가구 정도에 베틀이 보급됐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러면서 경성제직사라는 최초의 섬유공장이 생겼고, 닭을 도안한 ‘닭표 섬유’가 나왔는데 이게 한국 최초의 디자인 된 상표라고 했다. 그는 한국 최초의 공산품은 ‘한사슴표 성냥’이라고 했다. 1879년 4월 23일 자 제국신문에 광고가 나왔는데, 그 이전에는 ‘공장’에서 만든 상품 광고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근거를 댔다.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자신감 = 그가 들려 준 일화다. 90년대 서울의 한 미술관에서 그의 자료 기획전을 한 달 동안 열기로 했다. 그는 두 가지를 요구했다고 한다. 첫째는 한 달간 전시하는 대가로 1600만 원을 내 놓으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국립 미술관 하루 최대 동원 인원이 1만 4000명이었으니 한 달 동안 그보다 많은 1만 5000명을 동원하라는 것이었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그 미술관장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관람하는가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얼마나 영향력 있는 거물이 전시관을 찾아 방명록에 글을 남겼던 지와 도록을 남기는 데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대중에게 다가가는 전시 기획을 해야 하는데 계획 없이 무슨 전시를 하겠다는 것인지 답답했다는 것.
그런 관장에게 김 씨의 제안은 황당하기도 했을 터이다. 그래서 바뀐 조건이 1만 5000명에 미치지 못하면 작품료를 절반으로 깎자는 역제안이 들어왔고 김 씨가 이를 받아들였다. 김 씨는 이때부터 ‘근대성’을 주제로 언론에 홍보할 수 있는 다양한 자료를 제공하면서 관객몰이에 나서 1만 4000명을 넘겼지만, 목표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자료에 대한 자신감을 바로 보여주는 일화다.
그가 소사동에 ‘김씨 공작소’를 시작으로 ‘김씨 박물관’을 만들고 에코 뮤지엄을 만드는 노력이 알려지면서 진해시가 예산을 지원했지만, 그는 깨끗이 거절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것인데 관이 관여하면 오히려 일을 망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문화, 새롭게 디자인하고 스토리 부여해야 = 김의 제국을 건설하는데 그가 가장 집착하는 것은 ‘스토리’이다. 단순히 가진 것만으로는 가치 없으니 가진 콘텐츠에 스토리 부여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다.
‘부산라듸오’라는 간판을 내건 전파상 모형. | ||
“국립 박물관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 박물관이 있다. 그러나 큰 박물관 한 곳만 가보면 다른 박물관은 가보지 않아도 크게 관계없다. 유물의 종류와 수량에는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이 비슷하다. 스토리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문화물은 획일적·인위적인데 이런 데서 감동이 올 수 없다. 박물관은 유물 자체에 감동이 없으면 죽는다.”
그래서 그가 꿈꾸는 ‘에코 박물관’에 감동을 불러일으킬 스토리를 부여하겠다는 것이다. 그 감동은 철저히 디자인된 유물과 지역사, 개인사 같은 여러 장치에 따라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는 디자인 전문가이다. 80년대 초반, 그는 ‘Tom & Judy’라는 팬시 상표로 꽤 많은 돈을 벌었다. 당시 김혜수 씨는 톱클래스 배우는 아니었지만, 이 상표 광고 모델을 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한창 성공가도를 달릴 때 잘못 선 보증으로 하루아침에 그야말로 ‘쫄딱’ 망했다고 한다. 그 뒤 부산에서 ‘꽁뜨’라는 커피 전문점을 차려서 또 꽤 인기를 끌었지만 “너무 인기가 좋고 사람이 몰려도 망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고 한다. 분위기가 너무 좋으니 손님이 몰려드는데도 먼저 온 손님이 죽치고 앉아 자리를 비워주지 않으니 장사가 안되더라는 것. 그래 문을 닫고 말았지만, 그때 그 간판은 간직하고 있다가 지금 소사마을에 작은 카페를 차리고 그 간판을 내 걸었다. 소사마을 꽁뜨 카페에 가면 지금까지 그가 디자인했던 캐릭터며 상표가 달린 팬시물이 전시돼 있다.
그가 디자인한 ‘Tom & Judy’의 제품들. /정성인 기자 | ||
이런 개인사에서 보이듯이 그는 문화를 ‘디자인’ 하고 ‘비즈니스’로 접근해왔다. 그 이유는 이렇다. “재정 독립 안 되면 문화는 비굴해집니다. 문화를 상품화 할 때 학자에게 맡기면 백전백패하죠. 장사꾼 마인드 없이는 안됩니다.”
정보는 인터넷에 깔렸느니 만큼 문화를 해석하는 능력이 중요한데 학자 손에 문화가 들어가면 ‘창조’가 아니라 ‘학문’이 돼버리면서 박제화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디자인 속에는 바로 옆에 있는 김달진 문학관, 마을 뒤쪽 성흥사 계곡도 들어 있다.
◇김의 제국 스토리 라인 = 그가 수집한 유물은 대부분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생산된 것들이다. 그래서 그는 ‘근대성’에 주목하고 있다. 그의 조부모세대부터 부모 세대까지의 가족 근대사가 그가 구상하는 스토리 라인의 한 축이다. 다른 한 축은 크게는 진해, 작게는 소사마을의 지역 근대사가 메운다. 이 둘은 서로 넘나들기도 하고 따로 가기도 하면서 관람객의 개인사에까지 이어진다.
진해는 일제가 군항으로 개발한 근대 도시다. 소사마을 뒤쪽에는 웅동수원지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일제가 해군 생활용수를 공급하고자 조성한 인공 저수지인데 진해의 그 유명한 ‘벚꽃장’이 여기서 시작됐다고. “일제가 저수지를 조성하고 벚나무 숲을 만들었어요. 여기서 ‘벚꽃장’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김신조 사건 등이 터지면서 해군 식수원을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이 일대를 철조망으로 둘러치면서 민간인의 접근도 차단됐다. 그의 작은 꿈은 이 철조망을 걷어 내는 것이다. 그러면 소사마을서 수원지까지 450여m 길을 산책로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산책로로 활용하려는 길은 옛날 ‘관원길’이라고 불리는 길이다. 길옆에는 주막자리가 있고 옹달샘 자리도 있다. 주막자리에 있는 집은 최근 그가 어머니의 유산으로 샀다. 그냥 평범한 시골길이지만 그는 이처럼 이야기를 불어넣고 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선 한 아파트 단지 벽에 그가 ‘항일 투쟁으로 순국한 선각자 문석윤 선생 생가터’라는 간판을 붙여뒀다. 일제가 웅동수원지 개발 당시 수몰지 집단이주 거부를 주도하는 등으로 일제에 구금되고 탄압받다가 요절한 인물이다. 웅천은 또 진해 최초의 독립만세 운동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이는 일제와 빨리 부딪히면서 근대교육의 필요성에 일찍 눈 떴고, 그 교육의 영향이었다는 게 김 씨 설명이다. 이런 지역사에는 그의 외가가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근대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에 전력을 기울이는 동안 가세는 기울었고, 그의 어머니는 집에 밥숟가락 하나 덜어주고자 그의 아버지와 결혼했지만 그 집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이후 그의 부친이 중등 교원을 하면서 가세는 폈지만, 일제의 침탈 속에 한집안의 흥망사는 그에게 또 다른 훌륭한 스토리를 제공해준다.
따지고 보면 그의 스토리 라인이라는 게 그다지 특별한 것은 없어 보인다. 근대 조선팔도 어느 곳인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도 왜 이런 뻔한 스토리라인에 주목하는 것일까?
“결국, 문화는 감동입니다. 내 고민 없이 어떻게 감동시키나요. 감동이 없으면 유행으로 끝나지요. 김씨 박물관은 내 아버지의 문패, 한 번도 달려보지 못한 채 어머니의 장롱 속에 고이 보관돼온 자개 문패에서 시작해서 그냥 일반적인 나무 문패로 끝날 것입니다. 내 가족사 스토리입니다. 보편적인 역사를 가진 집안 이야기 속에서 각자 자기 집의 역사를 찾아보라는 것, 나를 찾으라는 메시지를 부여하고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데서 비즈니스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무위로 제국을 건설한다 = 그는 ‘무위’라는 말을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큰 맥락에서 그런 뉘앙스를 풍겼다. 굳이 인공적으로 어찌해보겠다는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김씨 공작소 옥상에서 마을을 둘러보면서 한 말이다. “저기 저 집과 그 뒷집은 아직도 온돌로 난방하고 있어요. 에코 뮤지엄이 뭐 별건가요. 그냥 옛집 박물관이 되는 거죠.”
지난 4일 그를 방문했을 때도 우물이 있는 집을 리모델링 하고 있었다. “이 집 우물물은 진짜 끝내줘요. 그냥 우물 박물관이 되는 거죠. 그렇게 사람들이 모여들면 필요에 따라 국수도 말아 팔 수도 있을 것이고, 차를 팔 수도 있겠지요.” 그뿐 아니다. 텃밭이 넓은 집을 가리키면서 그곳은 텃밭 박물관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자연스럽게 애호박도 팔고 전구지도 팔면서 주민들은 그곳에서 수익을 거둘 수 있을 것이고, 관광객들은 추억을 사가면서 윈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안 사가도 그만이지만 일반적으로 파는 것보다는 더 비싸게 팔 것이며 고도의 비즈니스가 형성될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 작업을 혼자 할 수 없다는 점도 알고 있다. 마을 주민들과 함께 해 나갈 계획이다. 4년 전 처음 마을로 돌아왔을 때 주민들의 시각이 곱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그가 진정성을 갖고 주민들과 만나고, 스스로 작업해 오면서 이제는 주민들의 이해도 많이 구했다고 한다. 그의 꽁트 카페는 그래서 이제는 마을 청년들이 모여드는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장사꾼치고는 꽤 잘했다는 평을 듣는 것”이 소원이라는 그는 꿈을 사람들의 감동으로 되살리고자 오늘도 구슬땀이다.
실비단님 블로그에서 봤던 거기군요. 여기 꼭 함 가봐야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