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주 “절친 정운찬 망가지면 안되는데…”
지난해 8월 국세청과 감사원, 검찰에 더해 청와대까지 나선 집중포화 속에 KBS 사장자리에서 쫓겨났던 정연주 전 사장이 오랜 침묵을 접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가 지난 11일 밤, 마산MBC PD들이 초청한 특강에 강사로 왔다. 이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걸어온 언론계 생활과 지난해 정부가 그를 쫓아내려고 어떤 수단을 썼는지, 앞으로 바뀔 미디어 환경 전망과 그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시민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털어놓았다.
강연을 마치고 통술집에서의 대화에 이르기까지 그는 언론계 후배들에게 대한 당부, 미디어 환경 변화에 대한 우려, 민주주의 후퇴에 대한 대응 등에 대해 열정적으로 토로했다.
최근 들어 침묵을 깨고 발언을 시작한 데 대해 “지난 1년 동안은 활동을 못했다기보다는 자제한 것”이라며 “(법원 재판)1심이 끝나면 활동 재개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데다 두 분 전직 대통령의 서거를 거치면서 그 아픔이 자극됐고 큰 울림으로 남아 활동을 재개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6월 남긴 “이기는 길은 모든 사람이 공개적으로 정부에 옳은 소리로 비판해야 하겠지만, 그렇게 못 하는 사람은 투표해서, 나쁜 정당에 투표하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나쁜 신문을 보지 않고 또 집회에 나가고 하면 힘이 커진다. 작게는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 된다. 하려고 하면 너무 많다. 하다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이 절규처럼 들렸다고.
◇인간 정연주
“나는 테돌이에요. 텔레비젼, 특히 드라마를 좋아합니다.”
정 전 사장은 TV 드라마에 얽힌 에피소드 두가지를 말했다. 하나는 한겨레 미국 특파원 할 때였는데, 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드는 시각이 새벽 2시였다고. 시차 때문에 한겨레 마감 시각에 맞추다 보니 그렇게 됐는데, 당시 한국에서 방영되던 드라마 테이프를 양껏 빌려두고 즐겼다고 한다. 2시에 잠자리 들기 전 “딱 1편만 보고 자야지”하는 생각에 드라마를 보기 시작하면 그냥 밤을 꼬박 새면서 드라마에 몰입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당시 영사로 미국에 있던 반기문 UN사무총장이 “뭐 좀 재밌는 일이 없느냐”고 해서 드라마를 추천해줬다고. 그랬더니 얼마 후 반 영사가 “그거 다 봤는데, 이제는 뭐 보면 되죠?”라고 묻더라고 했다. 그렇게 정 전 사장은 미국 있으면서도 한국 TV 드라마를 완전히 마스터 했다고.
다른 하나는 2006년 KBS 사장을 2달 정도 쉰 적이 있는데, 그 때 전남쪽으로 여행을 하던 중 어느 허름한 음식점에 들렀단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운영하는 식당인 듯 싶었는데, 서비스는 안중에 없고 두 여인이 TV 드라마에 푹 빠져 있더란다. 그걸 보고 그렇지 않아도 드라마를 좋아했던 그가 드라마에 대한 생각을 굳히게 됐다고. “그래 국민이 저렇게 몰입할 수 있고 삶의 활력을 줄 수 있는 방송을 해야지.”
요즘은 개그콘서트를 즐겨 본다고 말했다.
“엄 사장 당신에게 이 이야기를 꼭 해주고 싶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힘들고, 온갖 모욕과 비난과 인신공격이 당신에게 가해지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견디어 내야 하는 것이 바로 MBC 사장이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 역사 앞에서 감당해야 하는 책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마시고, 역사의 축복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오마이뉴스에 지난달 31일 기고한 ‘그들이 무슨 짓을 해도 결코 스스로 물러나지 마십시오’라는 엄기영 MBC 사장에게 보낸 공개편지이다. 지난 7일에는 역시 오마이뉴스에 ‘리영히 선생 격려 편지에 가슴이 저렸다’는 글을 썼다. 그 글에서는 리영희 선생과 백락청 선생,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의로운 싸움이다. 장렬히 전사하라’고 한 격려가 정권의 부당한 사퇴 압력 앞에서도 당당히 싸울 수 있었던 힘이 됐다고 밝혔다.
지난 7일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의원총회 초청특강에서도 “시간 날 때 엄기영 MBC 사장에게 격려 전화를 하라”며 “제가 겪어 보니 그런 격려와 지원, 사랑이 큰 힘이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엄기영 사장은 최근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의 해임 압력에 시달려 왔다. 지난 9일 열린 방문진 이사회에 엄 사장이 제출한 개혁 프로그램의 이행 여부를 지켜보겠다는 쪽으로 되면서 해임 압력은 낮아졌지만 MBC에 대한 정부의 압력과 내부 반발 등 순탄치만은 않을 전망이다.
여기에 대해 정 전 사장은 “KBS와 MBC는 순망치한의 관계”라며 “지난해 정치권력의 부당한 압력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여기서 포기하면 MBC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생각도 힘이 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방송이 거의 친여 성향으로 바뀌었는데 MBC 경영진마저 그렇게 교체된다면 어떻게 될까 걱정이 많다는 그는 “MBC 내부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외부에서 강제된다”고 내부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또한 “엄 사장에게 공개편지를 쓴 뒤 노조에서 한마디 해달라기에 ‘난관을 헤쳐나가는 데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해줬다. 지혜가 앞자리에 놓인다”고 내부에서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바뀐 미디어 환경을 보는 시각
미디어 악법 국회 통과 이후 전망에 대해서는 “어려워지겠지만 비관할 필요는 없다”는 말로 요약했다.
미디어 환경이 굉장히 안 좋지만, 정권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기는 쉽지 않으리라 전망했다. “미디어 악법에 따라 종편 3개 허용했을 때 3~5년 후 몇 개가 살아남을지 아무도 장담 못한다. 지상파 3사도 영향을 받고 영향력이나 광고 수익 등이 떨어지겠지만, 그 영향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는 것.
“조중동 방송 생기고 종편 등 많은 채널 생기면 경쟁 치열해질 것이다. 자본의 힘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광고에 대한 각종 규제 풀린다 하더라도 광고 총량은 연간 5000~6000억 원 정도 늘어날 것이다. 이걸 두고 무서운 싸움 할 것이다. 자연히 고품격 프로그램 만들기 어려워지고 막장 프로그램이 횡행할 것이다. 그러나 더 우려되는 점은 여론이 한쪽으로 쏠리는 것이다. 현재 보수와 진보 언론 비율이 9대 1 정도인데 더 쏠리면 어찌 되겠나. 여론이 쏠리면 경직될 수밖에 없다.”
“앞으로 언론 지형이 매우 어렵게 보이는 것은 사실인데, 역사 보면 거슬러 가는 것은 오래 못 가더라. 역사에 대한 낙관 버려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언론의 자유를 왜곡시키는 또 다른 권력은 자본권력이다. 어떤 언론사도 광고주의 압박에 자유로울 언론사는 없을 것이다. 요즘 이른바 진보매체에 대한 광고압박은 심각한 수준이다. 프레시안에 대기업 광고는 1개 남아있다. 오마이뉴스나 한겨레, 경향신문도 대동소이하다. 거의 고사 직전이다.”
◇언론 후배에 대한 당부
“상상플러스 같은 프로그램, 우리나라니까 하는 거예요. 최고 스타들을 그렇게 출연시키려면 출연료만 해도 얼마겠어요. 그런 측면에서 아직은 우리나라에서 방송은 권력이에요.”
YS 정권시절 조선일보를 ‘밤의 대통령’이라고 했던 이유를 들려주면서 언론이 엄청난 정치권력이 돼버린 상황에서 언론계 종사자들의 높은 도덕성과 역사에 대한 낙관을 요구했다.
언론의 기본인 ‘사실·진실 보도’와 아울러 ‘비판의식’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것. 이를 제대로 못 한 결과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라는 사건이었다고 했다.
“이미 피의사실 공표죄는 사문화됐다.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박연차 로비의혹) 보도가 어땠나. 검찰이 발표하는 것, 또는 빨대 통해 뽑아낸 정보를 받아쓰기밖에 더했나. 최소한의 사실확인도 안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우리 스스로도 잘 돌봐야 한다. 정말 신중하고 객관적이고자 노력했는가, 단어 하나 텍스트 하나 선정하는데도 객관적이고자 노력하면서 반론 기회를 충분히 주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또 한국 언론인 최초로 평양 취재를 했던 사례를 들면서 “인터뷰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전제하지 말라”는 당부도 했다. 김일성 주석 사망 당시 제네바 주재 북한대표부와 수없이 많은 인터뷰를 통해 신뢰를 형성한 것이 평양 취재의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또 1994년 북 외무성의 강석주 제1부상과 제네바합의를 탄생시킨 로버트 갈루치 전 미 국무부 차관보와 인터뷰를 하고자 10번 넘게 편지를 보냄으로써 결국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고.
◇시민사회에 대한 당부
편지쓰기, 전화하기, 인터넷 댓글 쓰기부터 시간, 돈, 노력, 재능의 기부, 그리고 적극적인 투표 참여, 촛불집회 등 여러 집회 적극 참여, 크고 작은 모임 만들기와 참여,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이 바로 ‘행동하는 양심’ ‘깨어 있는 시민’의 역사 참여. 그게 바로 건강한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가장 튼튼하고, 광범위하고, 무너트릴 수 없는 바위 같은 힘의 근원이다. – ‘리영희 선생 격려 편지에 가슴이 저렸다’
“사회적 균형을 위해 고사 직전 진보매체를 구체적으로 도울 방법 찾아야 한다. MB 정부 출범 이후 진보매체 정부·대기업 광고 줄어들고 왜곡됐는데 누가 그랬는지 알아보고 국민에게 알려달라고 민주당 강연에서 간곡히 부탁했다. 국민도 유료회원 가입하고 신문 한 부 구독하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다.” 거대 담론 못지않게 매우 구체적이고 실체적이고 실질적인 방안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촛불 주역은 20~30대 여성인데 이들을 투표장으로까지 이르게 할 프로그램이 핵심 과제다라고 밝혔다. 그렇게만 되면 역사를 바꿀 수 있다고 확신했다. “수많은 게릴라 미디어 나와야 한다. 1인 미디어 만들어 곳곳에서 혼자서라도 목소리를 내면 모여서 큰 힘 발휘한다.”
◇앞으로의 개혁 과제
정 전 사장은 역사가 발전하고 사회가 성숙 되는 것은 몇 가지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밝혔다.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 경직된 사회에서 유연한 사회로, 권력의 집중에서 분산으로, 독점에서 공정 경쟁으로 역사는 발전해왔다는 것. 그런데 최근 역사는 거꾸로 가는 것이 많다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권력기관 개혁과 지역인재 할당제 도입을 중요하게 제시했다.
“검찰, 국세청, 감사원, 국정원, 기무사 같은 권력기관은 공적 권력을 행사하도록 국민이 제도로 위임한 것이므로 정치권력으로부터 철저하게 중립적이어야 한다”면서 “그런 권력기관이 정치권력을 위해 움직이면 존립 근거가 없어진다. 지난 1년간 정치권력에 사유화된 듯 흘러왔다”고 말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권력기관 수장을 선거로 뽑는 방법을 고민할 때라고 말했다. “정치권력은 국민이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제도에 의해 위임받은 권력기관은 통제할 방법이 없다. 미국 보니 검찰총장, 판사도 투표로 뽑는 주가 많더라. 국민 사이 활발한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지역인재 할당제에 대해서는 그가 KBS 사장으로 재직 중 시행한 여러 정책 가운데 가장 보람있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신입사원 공채에서 영어 비중을 떨어뜨리고자 도입한 것이 지역인재 할당제와 한국어 능력인증인데 이 둘을 시행하기 전에는 최종합격자를 배출한 대학 수는 20개 안쪽이면서 이른바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출신이 대다수였다고. 그렇지만, 이 제도 시행 이후에는 출신 대학 숫자는 40여 개로 확대됐고 SKY 출신은 대학별로 6~7명, 그다음으로는 2~5명 정도 되는 대학이 10여개, 나머지는 1명씩 배출한 대학이더라고 말했다.
“할당제로 합격한 신입사원도 업무능력이 전혀 뒤처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출신 대학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제 몫을 해내더라”며 “지역 인재 할당제를 국가적인 정책으로 채택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교육문제가 상당 부분 해소될 것이고 수도권-지방간 격차도 상당 부분 해소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 전 사장은 현실 문제에 대해 강하게 이야기했지만 말을 아낀 부부도 있다.
그는 KBS 사장 재임 시절 수신료 인상을 추진해왔다. 그가 강제로 쫓겨나고 후임 이병순 사장이 최근 들어 다시 수신료 인상을 밀어붙이는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더니 “그 문제에 대해서는 답을 안 할래”라고 했다. KBS에 남아있는 좋은 사람들이 곤란해질 수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는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과는 이른바 ‘절친’이다. 서울대 66학번 경제학과 번호가 정 전 사장이 22번, 정 총리 후보가 23번이었다고. 1974년 동아일보 기자이던 정 전 사장을 비롯한 젊은 기자들의 신문 제작 거부, 그에 따른 광고 탄압 당시 미국 프린스턴대에 유학 중이던 정 총리 후보는 유학생들에게서 모금한 돈을 보내주며 격려해주기도 했단다. “아름다운 추억”을 가진 정 총리 후보에 대해 물었더니 “친구로서 말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그래도 아쉬웠던지 “그러면 안 되는데. 망가지면 안 되는데…….”라고 말했다.
그날 그자리에서 정 전 사장은 숨김없이 거침없이 이야기 했습니다. 다만, 뒤풀이 자리가 언론계 선배가 후배에게 이런 저런 얘기를 해주는 자리다 보니 미주알 고주알 바깥으로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더군요. 제 비망록에만 기록해두고, 정 전 사장의 요구대로 off the record를 지켜주고자 합니다. 그냥 선후배간의 의리 정도로 이쁘게 봐 저세요. ^^
친구이지만 가는 길이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겠지요. 그런 아쉬움을 묻어 어렵게 어렵게 한마디 한 게 아닌가 짐작할 뿐입니다. 가는 길이 갈리는데서 오는 인간적인 아쉬움… 그런 거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인지상정 아닐까요? 단지 그가 가는 길로 따라 갈 수는 없고, 그렇게 가는 길이 아닌데 대놓고 나무라지도 못하는 그런 아쉬움…
친구이지만 가는 길이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정연주 전 사장께서 할 말이 많았을 텐데…
속 시원히 말을 해 주시면 좋으련만…
숨김없이 거침없이 말하는 정연주 전 사장님이길 기대하는 것이 과욕일까요?
지금은 할말을 당당히 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만…
글 잘 읽고 갑니다.
그리고, 공감하고 갑니다.
그날 그자리에서 정 전 사장은 숨김없이 거침없이 이야기 했습니다. 다만, 뒤풀이 자리가 언론계 선배가 후배에게 이런 저런 얘기를 해주는 자리다 보니 미주알 고주알 바깥으로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더군요. 제 비망록에만 기록해두고, 정 전 사장의 요구대로 off the record를 지켜주고자 합니다. 그냥 선후배간의 의리 정도로 이쁘게 봐 저세요. ^^
노래도 잘 하시네요.
ㅎ 정말 노래 잘하지요? 근데 제목을 못 여쭤봤네요. 아쉬움 ㅠㅠ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강의가 있던 그날, 도민일보에서 신문 구해서 김현철 씨 기사도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언제 꽁뜨에서 차 한잔 하지요. 김현철씨가 기사 보고는 밥 한그릇 산다 했는데, 밥 얻어먹을 정도는 아닌 것 같고, 꽁뜨 가서 커피나 아니면 시원한 물 한 잔 달랠 수는 있을 것 같네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