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장하고 짰다는 우리 아들, 어쩌리오

반장하고 서로 질문 안하기로 짰답니다

토·일요일은 우리 아그들과 대화하는 날입니다. 일부러 그리 정한 것은 아닌데, 서로 여유 있는 날이다 보니 자연스레 그리됐습니다.

엊그제 토요일, 딸내미는 학교에서 방과 후 프로그램인 ‘난타’에 갔다 온다면서 점심 먹을 때 오지 않았습니다. 토스트 사먹고 난타 마친 후 오겠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우리 아들은 딸내미가 안 보이면 엄청나게 좋아합니다. 딸내미도 마찬가지로 제 오라비가 안 보이면 좋아하죠. 아직은 부모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나 봅니다.

토요일 점심 먹으면서 아들 기분이 한껏 업 돼 있더군요. 시시콜콜한 학교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중에 압권은 “일부러 공부 좀 못하는 애들하고 같은 조를 하겠다고 자청했어요”였습니다. 이어 “반장하고도 짰어요. 서로 곤란한 질문은 안 하기로”라네요.

며칠 전부터 아들은 학교 과학 시간에 발표할 프레젠테이션 준비한다고 바쁩니다. 과학 선생님이 지네 반 전체를 7개 조로 나누고, 각각 과제를 줬나 봅니다. 조별로 발표를 시키고, 그 결과를 수행평가 점수로 주겠다 했다네요.

아들내미는 액체의 분리에 대해 준비하고 있다 했습니다. 액체를 분리하려면 흔히 생각하는 게 ‘증류’인데, 이 밖에도 중학교 수준에서 알아야 할 것이 더 있나 봅니다. 인터넷도 뒤지고 도서관에도 갔다오고 여간 바쁜 게 아닌 모양입니다. 그렇게 준비하는 모습 보면서 ‘얘가 제대로 준비하나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허걱, 얘 속에 영감이 들어앉아 있었네요.

1. 일부러 공부 좀 못하는 애들과 조를 짰다

우리 집 아들내미는 초등학교와 중1 때 각각 영재교육원 교육을 받아서 프레젠테이션하는 데는 비교적 익숙합니다. 그래서인지 이번 준비 과정도 주도하는 듯하더라고요. 예사로 ‘경험이 있으니 그리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더군요.

일부러 공부 좀 못하는 애들하고 같은 조를 자청했다고 하네요. 다른 조원들을 믿을 수 없다보니 지 혼자 준비를 다하는 듯했습니다. 조원들을 집으로 불러 각각의 역할을 연습시키고, 내일까지 이러저러한 자료를 찾아오라고 얘기하는 게 제법 연구팀장 같은 면모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처럼 지 혼자 바쁜 이유를 들으니 기가 막힙니다. 공부 잘하는 애들하고 같은 조가 되면 조 전체 수행평가 점수가 올라갈 수는 있겠지만, 아들하고 경쟁해야 할 애들 점수가 다 올라가니 우리 아들이 얻는 이익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신 공부 못하는 애들하고 같은 조가 되면 그 애들 수행 점수 올라가도 우리 아들의 성적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어찌 보면 지 혼자 해도 점수 올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의 발로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혼자 살겠다는 전형적인 ‘이기주의’의 발로로 보였습니다.

2. 벌써부터 ‘짬짜미’를 알아버리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반의 반장하고 신사협정을 맺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아들은 7개 조 가운데 7조로 맨 마지막에 발표해야 한답니다. 1조 발표를 지난주에 했는데, 우리 아들 말로는 ‘고등학생하고 초등학생이 논쟁하는 것 같았다’라네요. 1조에서 열심히 준비해서 발표했는데 반에서 성적 선두그룹에 있는 친구가 한 질문에 발표자가 대답을 못해 쩔쩔매더라는 것입니다. 중2 수준에서 애써서 발표 준비를 했는데, 아주 수준 높은 질문 하나에 그냥 점수를 까먹더라는 것이었지요. 이걸 보고 아들은 생각했답니다. ‘준비를 아무리 잘해도, 내가 아직 생각하지 못한 질문이 나오면 망칠 수 있겠구나’ 싶어 까다로운 질문을 할 만한 사람을 찾아보니 반장이 눈에 띄더라는 겁니다. 그래 반장에게 제안했다네요. 서로 부담될 질문은 하지 말자고 제안했고, 반장도 그러자고 했답니다.

그래서 내가 물어보았습니다. “너는 다른 친구들 발표하는데 까다로운 질문 안하니?” 그랬더니 얘가 “왜 질문을 안 해요? 준비 제대로 안 해왔다면 한 번 혼이 나봐야지요. 정말 엉터리 발표를 하는 애들은 정신 좀 차려야 해요”랍니다.

‘니가 그리 까다롭게 질문하면, 맨 마지막에 발표하는 니는 아마 질문 홍수 속에서 헤어나지 못할거다’라고 얘기해도 얘가 아니라네요. 그렇게 수준 높은 질문을 할 애들은 반에서 서넛에 지나지 않으니 걔들하고 신사협정 맺으면 되고, 그런 애들을 빼고 나머지 조에 수준 높은 질문 하면 발표하고는 관계없이 선생님이 수행평가 점수에 가점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3. 여기서 말문이 막히다

한 30분 점심 먹으면서 나눈 대화 속에서 우리 아들의 이면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로 따지자면 우리 아들 이야기가 하나도 그른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어른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데, “아들아 너그는 그리 살면 안된다”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가슴은 음식 먹고 얹힌 것처럼 답답합니다. 입에 맴도는 말은 ‘아들아 세상은 그런 꼼수로 사는 것이 아니란다’ ‘정정당당해야지 사전에 밀약을 맺고 난관을 피해가는 것은 사내가 할 짓은 아니다’ ‘신사협정이 깨어질 경우를 생각해봤느냐. 그런 경우를 상정하고 니가 먼저 신사협정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해봤느냐’ 묻고 싶은 말은 참 많았지만 하나도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아들에게 묻고 나면 대화가 더 길어질 것이고, 현실과 대비하다 보면 내 말이 너무 도덕 교과서로 흐를 가능성이 컸기 때문입니다.

4. 반면교사가 되다

이건 아니다 싶으면서도 말 한마디 못하는 상황. 그 상대가 어리게만 봐왔던 아들이라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날 그랬습니다. 신호등 노란불인데도 괜찮다며 그냥 달리는 운전습관, 고속도로 제한속도 100㎞인데도 단속카메라 없다고 130~140㎞로 달리는 나. 그런 나를 보고 아들은 이처럼 영악해져 있었습니다. 아들 나무랄 수 있을 만큼 내가 그렇게 도덕적으로 살지 않았다는 것이었지요. 운전 상황을 예로 든 것은 내 사는 모습을 아들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상황이 운전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 밖에도 내 모습을 보고 아들은 자신의 가치관에 가감해가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컸겠지요.

결국, 내가 달라지지 않고 아들에게 달라지라고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바담 풍 해도 니는 바람 풍 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내가 달라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이미 저렇게 세상 물정을 알아버렸고, 그에 적응해나가는 방식을 실천하는 우리 아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디지로그

축구가 좋은 축구입니다.

7 Responses

  1. 줌마띠~! 댓글:

    요즘 애들은 원체 영악해서리….화이팅..^^

  2. 구르다 댓글:

    이것도 성장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그러면서 세상을 배워가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도 몸에 익힐 것이라 봅니다.

  3. 이윤기 댓글:

    아빠와 이런 이야기를 부담없이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으니 건강한 아들입니다. 아이를 바르게 키운다는 것은 곧 부모가 바르게 산다는 것이더군요. 교사로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교사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자신의 뒷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더군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부모 노릇 참 쉽지 않습니다.

  4. 크리스탈 댓글:

    전에 경남풀뿌리 경남도민일보에 링크되었던게 주소가 바뀌었습니다.
    전에건 제 메일로 되어있었는데
    단체아이디로 새로 만들었어요.
    수정해 주시면 감사…

    http://hamke.tistory.com/

  5. 크리스탈 댓글:

    아이들을 탓하기보다는 어른인 우리가 먼저 반성해야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옳은일인것처럼 묻어두는것도 옳지 않은것 같습니다.

    너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게 옳은일은 아니라는것은 충분히 얘기를 해야할 거 같습니다.
    그놈의 수행평가가 문제네요.

  6. 세미예 댓글:

    참 재밌는 자제분이군요. 잘보고 갑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자란답니다. 고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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