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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유·장류·주류업, 창원 근대산업의 주춧돌

섬유·장류·주류업, 창원 근대산업의 주춧돌

우리나라는 전래부터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직업 귀천이 있는 사회로 생산·유통을 담당하는 산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1876년 조선이 개방을 하고 부산을 시작으로 인천·원산항을 개항하면서 일본인·청국인 등이 그들 나라의 상품과 다른 서구의 문물을 들고 와 조선 시장을 급속히 잠식했다....

높았던 개화 파도만큼 거셌던 진해지역 항일 열풍

높았던 개화 파도만큼 거셌던 진해지역 항일 열풍

1919년 4월 29일 하오 1시 창원군 상남면 마산헌병대 사파정 출장소에서 서쪽으로 약 400m쯤 되는 진해~창원간 대로상에서 학생 청년을 중심으로 약 50여 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다.…헌병들이 허둥지둥 무기를 챙겨들고 시위 함성이 들리는 곳으로...

근대 창원을 가다 (6) 항일의 길 – 민족교육

근대 창원을 가다 (6) 항일의 길 – 민족교육

1922년 웅천장날 진해 수도에 사는 청년이 중절모를 쓰고 나타나자 성내에서 모자점을 하는 가토가 누명을 씌워 웅천주재소에 고발했다. 일본인 순사가 “조시니노미가 도도지리니”(조선놈이 도둑질이나 하고) 하면서 모자를 빼앗고 청년의 뺨을 때렸다. 이후 웅천 청년단원이 나서 청년의...

우리동네 방공호 어디 있을까?

우리동네 방공호 어디 있을까?

경남의 방공호는 믿을 수 있나? 북한의 포격으로 연평도에서 민간인 2명이 숨졌다. 해병대원 2명이 숨지고 10여명이 다쳤지만, 사람의 목숨을 두고 비교할 일이야 아니지만, 전투력이 없는 민간인이 숨졌다는 것은 북한에 대해 전범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이다....

창원 근대를 가다 (5) 항일의 길 – 일제 초 항일

창원 근대를 가다 (5) 항일의 길 – 일제 초 항일

일제강점기 항일의 요람 웅천면(熊川面) 조선말 웅천군의 행정중심인 웅천읍이었던 곳으로 1914년 창원군 웅천면으로 개칭됐다. 1407년(조선 태종 7년) 한국 최초로 개항한 ‘웅천 제포(내이포)’가 있던 곳으로 조선시대부터 왜구의 침입이 끊임없었던 곳인데다 한국의 근대기에 식민지 점령국이었던 일본의 군항도시로...

창원 근대를 가다 (4) 침략의 길 ③ 진해군항

창원 근대를 가다 (4) 침략의 길 ③ 진해군항

1509년 중종실록에 웅천현 생활모습을 기록했다. “웅천현 보평역은 일본인 거주지와 거리가 겨우 1리 남짓한데 ㅇ리본인 남녀가 부채를 징수해 낸다는 핑계로 우리 민가에 들어가 밤낮 없이 왕래하여 서로 친하고 사랑함이 형제와 같고 …… 짧게는 1~2년 길게는...

창원근대를 가다 (3) 침략의 길 ② 웅동 저수지

1882년 ‘자국 영사관 보호’라는 명분으로 일본군이 서울에 상주하게 됐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으로 청국군이 국내에 들어오자 이것을 빌미로 대규모 일본군이 유입되면서 이땅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이를 기회로 서울에 2개 중대(1개 중대는 200여 명), 부산과 원산에 각각 1개...

창원 근대를 가다 (1) 프롤로그

창원 마산 진해가 합쳐 통합 ‘창원시’로 출범했다. 역사 속에서 창원은 마산 진해와 따로 존재하기도 했고 하나로 합쳐 존재하기도 했다. 통합과 분할이 되풀이돼 온 ‘통합’ 창원은 한국 근·현대사 격랑의 중심에 있었다. 수도권이 아님에도 일제의 군항...

스님 전용 주차장, 하나만 보면 열을 안다

스님 전용 주차장, 하나만 보면 열을 안다

여러 해 만에 경남 진해에 있는 성흥사에 가보았습니다. 뭐 그다지 볼거리가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이 엄동설한에 계곡에 놀러갈 일도 없으니 ‘스님 전용 주차장’을 보고자 일부러 찾아간 것이 맞습니다. 며칠 전 김훤주 기자가...